“자네 장항리 절터 가보았나?”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에서 정양모 전 중앙박물관장과의 대화를 통해 성덕대왕신종(에밀레 종)종소리, 진평왕릉과 함께 폐사지인 장항리 사지를 꼽으면서 ‘이 세가지를 잘 음미해야 신라 문화의 품격을 알 수 있을것’이라고 썼다.
장항리사지는 양북면 장항리에 위치한 토함산 동쪽에 있는 절터로 현재 법당터를 중심으로 동서에 탑 2기가 남아있다. 경주를 안다고 하는 이들도 이 곳 장항리 사지 폐사지를 아는 이는 드물다.
책을 통해 그나마 알려져 유명세를 타기도 했지만 경감로가 지난해 신설된 이후부터는 탐방객들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감포로 가는 신도로가 나기 전에는 무심히 지나가다가 이곳을 많이 찾았는데 요즈음은 답사팀들이 찾고 있는 정도라고.
지난 12일 찾은 이곳은, 자연석을 이용해 조성된 길을 거쳐 경사가 급한 지형에 그대로 데크로 길을 만드는 등 장항리 사지는 무척 정비돼 있었다. 이처럼 단장되기 전에는 계곡으로 내려가 다리를 건너고 경사가 몹시 가파른 오솔길을 따라 비지땀을 흘리며 올라가야 했다.
주변이 정비되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우리가 옛 정취를 그리워하는 것은 왜일까. 시간성이 녹아있는 그때 그 자연스런 장면을 잊지 못해서일 것이다. 최소한의 정비를 통해 경관을 살리고 시간의 흐름을 기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사지의 연화대좌에 조각돼 있는 주먹 불끈 쥔 천진난만한 사자는 익살스럽게 웃고 있었다. 슬며시 사자를 보며 따라 웃어본다. 장항사지 동탑 주변에는 탑의 여러 부재들, 즉, 면석부분 2개, 탑신, 지대석인 하대부분, 옥개석 받침 일부분 등이 흩어져 있었다. 석재 여기저기엔 아직 생장하고 있다는 고착 상태의 이끼류가 저승꽃처럼 끼어 영원성을 더했다.
동탑의 탑신을 어루만지며 그간의 상흔을 위로해 본다. 신라시대 뭉툭한 장인의 손끝에서 피어올랐을 예술혼이 기자의 손끝으로도 전해지는 듯했다. 무심히 나뒹구는 와편에서도 당시 장인들의 손길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기와를 만들며 물로 문지른 자국, 타격 자국, 기왓장 뒷면에는 삼베의 섬세한 조직과 삼베로 누른 자국 등이 화석이 된 그대로였다.
-쌍탑 1금당으로 통일신라시대 전형 보이나, 아직 강당과 회랑 자리 밝혀지지 않고 있어
경주장항리 사지는 토함산 동남쪽 계곡의 비교적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다. 절터가 있는 계곡은 대종천의 상류로 감은사터 앞을 지나 동해에 이른다. 절을 지은 연대나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데, 장항리라는 마을 이름을 따서 장항리사지라 불러오고 있다.
계곡의 높은 절 터 위에 터를 닦고 중앙에는 불상을 모시기 위한 금당을 마련했다. 잘 다듬은 돌로 기단을 만들고 위에 덮개돌을 얹었던 흔적이 있으며 건물의 앞쪽으로 계단을 마련했다. 절터에는 서탑인 5층 석탑과 파괴된 동탑의 석재, 그리고 석조불대좌가 남아 있다.
서탑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일본인들이 탑 속에 들어 있는 보물을 훔치기 위해 폭파시켜 파괴한 것을 수습해 다시 세웠다. 동탑은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절터에 모아두고 있다. 무너져 있던 1층 몸체돌과 지붕돌 다섯을 포개어 다시 세워 놓았다. 기단부와 나머지 몸돌은 없다.
지반이 무너지면서 동탑이 붕괴됐고 이후 아무렇게나 뒹굴던 석재를 수습해 쌓은 게 현재의 동탑이다.
장항리사지는 계곡 사이의 좁은 공간을 이용해 쌍탑을 세우고 그 뒤쪽 중앙에 금당을 배치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쌍탑 1금당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을 보이나, 아직 강당과 회랑의 자리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경주장항리사지 서오층석탑...8세기 전반 석탑의 새로운 양식 보여주는 걸작품
현존하는 신라 오층석탑 2기 중 하나로 1987년 3월 국보 제236호로 지정됐다. 높이 9.1m으로 무너져 있던 탑재들을 이중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려 복원한 석탑이다. 금당터를 중심으로 동탑과 서탑이 있었으나 도굴범에 의해 붕괴된 것을 복원이 가능한 서탑만을 새롭게 복원해 놓은 것이다.
신라시대 석탑 양식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큰 규모의 석탑으로 상륜 부분에는 노반(露盤,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상륜부를 받치는 부재)만 남아 있다. 하층기단에는 양쪽에 우주(모퉁이에 있는 기둥)를 새기고, 각면에 2개씩의 탱주(버팀 기둥)를 새겼다.
2층 기단부에도 양 우주와 각 면에 2개씩의 탱주를 새겼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을 각각 한 개의 돌로 만들었고, 1층 탑신 4면에는 문과 좌우에 인왕상을 조각하는 희귀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1층 탑신을 돌 한 덩어리로 만든것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옥개석도 하나의 통돌이었다. 절리도 없는 상당히 큰 원석을 구해 와 조각했다는 것과 비교적 높은 이곳까지 석재를 끌어 올렸다는 것이 놀라웠다. 기단의 면석도 이음새가 없이 한 면에 하나의 돌로 4개의 면석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 위의 각층 탑신에도 양 우주가 조각되고, 옥개석은 받침이 5단씩이다. 낙수면 상부에는 2단의 탑신굄을 새겨서 낙수면이 평평하고 얇으며, 네 귀퉁이는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경쾌하다. 4귀의 추녀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들이 있다.
이 탑은 각 부의 비례가 아름답고 조각의 수법도 우수해 8세기 전반 석탑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는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신라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서탑은 지금 복원 공사중
장항사지 서탑은 문화재청과 경주시에서 ‘(주)금오문화재보존’에 복원 작업을 의뢰해 복원 공사가 한창이었다. 침묵의 소리가 깊어 적요할것만 같은 절터는 요란한 기계 소리가 잠식하고 있었다. 물론 곧 복원이 마무리 될테지만.
복원담당자는 “이번 서탑의 복원 공사는 지난 5월부터 시작했다. 서탑 옥개석과 기단 일부의 시멘트로 덮고 있는 부분을 제거하고 서탑의 석질과 가장 유사한 석질로 표면을 복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면서 “이 탑의 석질은 장항사지 주변의 화강암으로 보인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붉은 돌로서 이 돌은 장항리 주변에 많이 분포한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복원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잦은 복원 공사로 찾을때마다 탑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볼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상처많은 이 유적의 혼령이 있다면 신산하기 이를데 없을 것 같았다.
-복원된 장항리사지 석조불상...원래의 장항사지에서 다시 볼 수 있었으면
금당으로 보이는 건물터에 있는 석조불대좌는 아래와 위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아랫단은 팔각형으로 네 곳에는 동물이, 다른 네 곳에는 신장을 조각했다.
윗단은 아래위로 붙은 연꽃을 16송이씩 조각한 원형대좌다. 이 대좌 위에 모셔졌던 것으로 보이는 석조불상은 여러 조각으로 파괴된 것을 1932년 서탑을 복원하면서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에 옮겨 일부를 붙여 세웠다.
현재 박물관의 북쪽 뜰에 전시돼 있다. 불상은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었던 것을 복원했으나 뒷부분의 광배 일부와 무릎 이하는 일부가 빠져 없어졌다.
2년전 원형에 최대한 가깝게 복원을 해서 시멘트로 얼룩져있던 흉측한 모습이 말끔해졌다. 머리와 얼굴모습 그리고 광배에 새겨져 있는 작은 부처인 화불 등을 새긴 수법을 볼 때 8세기경에 만들어진 여래입상으로 추정되며, 현존 높이는 3m지만 실제로는 4m이상 되는 큰 불상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복원된 이 불상을 원래의 장항사지에서 다시 볼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