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물결들 사이, ‘보문들’에 서면 금세 무장해제 되고 만다. 여느 시골마을 들판처럼 평온한 가을햇살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옥곡이 여물고 있었다. 보문관광단지 가는길 ‘남촌마을’오른편 들판을 ‘보문들’이라 부른다. 이 들은 경주 낭산과 명활산성 사이, 진평왕릉이 있는 들판이다.
평범해 보이는 보문들에는 국보 제37호인 경주황복사지 삼층석탑을 비롯해 경주보문사지 석조,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 경주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 경주 진평왕릉, 경주보문동 사지 등
국보 1점, 보물 3점, 사적 2점이 황금들판 사이사이에 ‘숨어있다’. 숨어있다는 표현은 아직 이들 문화재들이 보문들에 있다는 것을 아는 이가 적은편이고 설령 안다고 할지라도 이들을 답사하는 이들은 드물기 때문이다.
이 들 문화재들을 둘러 볼 정확한 길도 없는데다 논들 사이로 난 농로을 따라 걷거나 논둑길로 찾아가야하기 때문이다. 번듯한 길을 내고 이들 문화재들을 찾아가는 것은 용이하기는 하겠지만 지인과 함께 논두렁을 따라 찾아가 보는 수고로움을 권하고 싶다.
제철을 만난 메뚜기들이 지천으로 천방지축 뛰놀고 들판의 벼들에서 풍기는 가을의 향기는 한껏 여유로움을 풍긴다. 억새며, 개망초, 부들, 들국화, 갈대, 이름모를 들꽃들을 보며 걷는 보문들은 풍성함을 배가시켜준다.
아무렇게나 뒹구는 고대 기와의 파편들을 밟기도 하며 들 사이로 보일듯 말듯한 신라의 유물들을 찾아 만나는 즐거움이란..., 황금빛 너울거리는 보문들로 이 가을이 가기 전에 한 번 다녀오시라.
황복사터 삼층석탑 너머에서는 너른 들판 사이로 꼬불꼬불 길이 이어져있고, 진평왕릉에서는 멀리 박물관 동쪽, 남북으로 나즈막한 낭산을 바라볼라치면 그 너머 남산의 능선도 굽이칠테니...,
-경주황복사지 삼층석탑, 국보 제37호
이 석탑은 이중 기단위에 3층으로 쌓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모슴을 잘 보여준다. 1943년 이 탑을 수리할 때 탑에서 순금으로 만든 여래 좌상 및 여래 입싱과 금동 사리함이 나왔다. 여래 좌상은 국보 제 79호며 여래 입상은 국보 제 80호다.
이 두 불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사리함 뚜껑의 안쪽면에 새긴 긴 글에 따르면 효소왕이 부왕인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692년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탑을 세운 목적이 명백하고 건립 연대를 추정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탑이라고 할 수 있다.
-경주보문동사지, 사적 제390호
이 절의 처음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보문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돼 절 이름이 보문사 였음이 확인되었다. 석제 유물이나 건물의 배치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절로 추측되고 있다. 현재 금당지, 동서 목탑지 등의 건물터와 석조, 당간지주, 초석, 부재 등이 남아 있지만 절터의 대부분은 넓은 논으로 경작되고 있다.
금당지의 높이는 경작지의 표토에서 1미터 정도이며 흙으로 쌓은 축대위에 건물의 기단석과 초석이 배치돼 있다. 목탑지는 근당지 앞의 높은 단 위에 남아 있는데 서탑지의 중앙에 남아있는 대형 초석에는 연꽃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보문동 사지 서쪽에는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가 있고 북쪽으로는 경주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가 있다. 이 밖에도 경주 부문사지 석조를 미롯해 석등의 지붕돌 및 장대석 등 석조물이 남아 있다.
-경주보문사지 석조, 보물 제64호
이곳은 신라시대부터 중요하게 여겨온 낭산과 명활성 사이에 형성된 들판으로 보문사라고 새겨진 기와를 통해 절 이름이 알려졌다. 부근에는 부처님을 모셨던 금당터와 동서의 목탑터, 당간지주 등이 남아있다.
이 석조는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절에서 물을 담아 사용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로로 놓인 직육면체의 돌 안쪽을 파냈으며 외부와 내부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불국사 안에 있는 4개의 석조가 모두 장식돼 있는 것과 대조하면 대조적이다. 이 보문리 석조는 뒤편 북쪽 가운데 아랫단에 물을 빼기 위한 구멍이 남아있어 실제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하고있다.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123호
이곳은 보문사터의 중심인 금당터, 동서탑으로부터 남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이다. 이 당간지주의 안쪽면은 평면이며 나머지 세 면의 아래쪽은 잘록하고 그 위는 점차 가늘어진다. 상중하 세 곳에 당간을 고정시키던 구멍이 남아있다.
남쪽 기둥은 구멍이 완전히 뚫려있고 북쪽 기둥은 반쯤 뚫려있어 특이하다. 현재 북쪽 기둥의 윗부분 일부는 부러져 없어졌으나 전체의 모습은 크고 소박하다. 특히 한 기둥에만 구멍을 뚫은 것은 매우 드문 예다. 두 기둥 사이에 놓였던 당간 받침은 없어졌다.
-경주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 보물 제910호
이 기둥은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로 높이는 146m다. 기둥의 아랫 부분이 상당히 매몰되어 있어 간대나 기단부의 구조를 확인할 수 없다. 현재까지 원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동서로 간격을 두고 두 개의 기둥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기둥의 안족에 있는 너비 13㎝의 큼직한 구멍은 당간을 고정시켰던 장치다. 특히 이 당간지주의 윗부분 바깥 측면에 설정된 방형구획안에는 지름 47㎝의 팔엽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이 당간 지주의 원래 소속사원이 보문사인지는 알 수 없다. 제작 연대는 8세기 중엽 이후로 추정되며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 중에서 가장 특수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경주진평왕릉, 사적 제180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유홍준 교수는 진평왕릉을 온화하며 굳세다고 표현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진평왕릉은 낭산 동쪽 산자락이 시작되는 구황동 낮은 산비탈 논밭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 봉분에는 아무런 치장이 없다. 그러나 경주에 있는 155개 고분 중에서 왕릉으로서 위용을 잃지 않으면서도 소담하고 온화한 느낌을 주는 고분은 진평왕릉 뿐이다. 화려해야 눈에 들어오고 장식이 많아야 눈이 휘둥그레지는 안목으로는 진평왕릉의 격조가 잡히지 않는다’고.
이 능은 신라 제26대 진평왕이 모셔진 곳으로 명활산과 낭산 사이에 있는 보문동 일대의 평야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의 높이는 약 8m, 지름은 약 40m로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이다. 봉분 아래쪽은 자연석을 이용해 호석을 돌렸으나 현재는 몇 개만 드러나 있다. 능 앞에 설치된 상석과 향로석은 후대에 설치된 것이다.
진평왕은 남산신성을 쌓았고 명활성을 개축하는 등 서라벌의 방위를 중요시했다. 재위 기간동안 고구려, 백제와 싸움이 빈번했으며 중국의 수나라, 진나라, 당나라와의 외교에 힘 써 후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안되는 일인줄은 알지만 봉분 위까지 올라가보았다. 진평왕이 노하실까? 전전긍긍하며. 너른 보문들이 한결 시야에 잘 들어왔다. 책에 소개되면서 유명세를 타서일까. 아니면 지나치게 단정하고 깔끔하게 단장이 돼서일까. 진평왕릉은 그 자리에서 변함이 없는데 소슬하고 고아했던 정취는 덜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