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2일 우리는 이탈리아를 떠나 버스로 8시간 정도 걸려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도착했다. 잘츠부르크는 옛 것과 새 것이 조화로운 화합의 도시로 모짜르트의 탄생도시며 영화 ‘Sound of Music’의 무대로도 유명하다.‘오스트리안 로마’로 알려진 건축물들로 가득 차 있어 여행자들은 이곳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입을 모은다.
골목에 녹아든 모차르트의 흔적들로 골목 모퉁이마다 모차르트의 아리아가 흘러나오고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 잘츠부르크를 크게 3개 지역으로 구분하면 신시가지와 구시가지, 그리고 시 교외에 있는 잘츠캄머구트로 나눈다. 잘츠부르크는 인근 암염광산 때문에 ‘소금(Salz)의 성(burg)’이라는 독특한 의미를 지닌 도시다.
소금광산은 명성과 부라는 선물을 안겨주었고 추기경들은 짤츠부르크를 작은 로마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삼면이 숲으로 둘러싸이고 부드럽게 휘어진 잘자흐강을 따라 집들이 배열해 있다. 짤츠부르크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호헨짤츠부르크 성, 모차르트의 생가가 있는 빛바랜 게트라이데 거리,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됐던 바로크양식의 미라벨 정원 등 그 어떤 도시도 짤츠부르크만큼 가슴 설레게 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아주 ‘고집 센 도시’잘츠부르크...증축하지 않고 고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잘츠의 대기는 한층 신선했다. 따가운 햇살만큼은 여전했지만. 벌판의 작은 헛간조차도, 도심의 아파트까지도 조화로운 색감으로 표현하는 그들의 탁월한 미학적 안목에 연신 탄복했다. 소박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고색한 문화유적과 조화로운 집, 건축물들...,
잘츠부르크는 아주 ‘고집이 센 도시’다. 구시가지는 가장 오래된 도심으로 대형 버스 등은 운행하지 못한다. 철저하게 교통을 관리해 잠깐의 주차도 허락지 않는 친환경적인 도시였다. 지하철도 마다할 정도로 친환경적인 시민들, 수력 발전을 이용해 대부분의 전기를 충당하는 도시라 했다. 수도원과 성당으로 넘쳐나는 도시, 구시가지는 바둑판처럼 짜여져 오래된 것을 자랑하기 위해 칠도 하지 않는다는 도시, 증축하지 않고 고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그들.
오래된 것에 대한 자존심은 유별나다. 무조건 보존이 원칙이고 닦고 관리한다. 수백년 된 건축물이나 갓 지은 건물이 구별이 되지 않을 만큼 고도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2000년 역사를 가진 잘츠시 전체 인구는 15만명이며 구시가지에 1만2000명이 살고 있다. 아직도 지표층에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도시. 1900년대 도시 개발을 시작해 성벽을 없애고, 도시개발로 확장이 이루어졌다. 1967년 구시가지보존법이 제정됐고 보호구역은 법 제정 후 점점 확대돼 1995년 현재의 보호구역으로 확대됐다. 1400여 개 아파트(대부분 5-6층)중 1000개가 보호구역 안에 있다. 물론 이와 관련한 법률 규정이 있다.
오스트리아는 전체 3만6500개 보호유적이 있다. 그중 2만6000개가 건축물이다. 잘츠주에 있는 보호 유적은 2500개다. 문화유적관리는 여러 계층의 협력 작업이 필수적이다. 중앙정부, 소유주, 정책 입안자, 수행하는 업체, 작업자, 건축당국, 각종 위원회가 협력해서 일을 풀어가는 것이 특징이다. 감정위원회는 5명의 전문가(인터뷰이 2명 포함)로 구성돼 있다.
재정 후원은 중앙정부와 주가 함께 연간 100만 유로를 지원한다. 직접 지원하며 상한액은 없다. 중요도에 따라 지원액이 결정되는 것.
부유한 상인이었던 게테라이데 가세의 집은 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정돼 전액을 지원한 것은 대표적 사례다.
이 도시의 문화유적 보존 방안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1860년까지 대주교 사저로, 이후 잘츠부르크 주의 전체적인 센터(행정부)로 사용되고 있는 ‘잘츠부르크 킹 제 호프(궁전안뜰)’에서 빅토르 브로야키(Viktor Brojatsch·잘츠부르크 주 소속 구시가지 담당)씨와 에바 호디(Eva Hody·잘츠부르크 연방유적청 담당자)씨를 만났다.
-일일이 다큐멘터리로 기록해 미래로 전달하는 작업 매우 중요, 복원은 존중받는 오래된 직업
에바 호디씨는 “문화재를 보존하는 것은 변화와 관계돼 있다. 문화재는 오래됐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훼손되거나, 또는 변화하면서 보존하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유적을 잘 보존하는 것은 종류에 따라 개념이 다르다. 건축, 모차르트기념비, 낡은 농가, 시민의 집, 성당까지 유적이며 그 종류에 대한 관리 또한 다르다”고 했다.
1745년 마리아 테리지아 여제가 도시의 건축물을 보전하는 법을 만들라는 명령으로 1923년 오스트리아 헌법에 문화재유적보호법이 명시됐다고. 유적보존 법안은 국가적 차원을 넘어 여러 기구와 협동한다. 잘츠부르크의 경우 감정위원회나 NGO, 개인그룹이 있으며 이 모든 활동은(국가든 지역이든) 구시가지 보존법에 의해서 이뤄진다.
그녀는 “예를 들면 보존 대상이 생겼을때 우선 학문적인 연구를 시작한다. 그 이후 법적 근거가 되는 유적보호법을 통해 어떻게 보수하고 유지할 지를 결정하게 된다. 법 아래 시행령이나 시행규정이 세분화돼 있다. 사실 너무 많은 문화재가 있기 때문에 크게 성당, 오래된 성, 건축물 등을 카테고리로 구분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하는 중요한 일은 문화유산을 중개하고 전달하는 일이 있다. 미래 주역인 청소년이 우리의 일을 물려받아 보존하고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오스트리아 문화유적관리는 여러 계층 즉, 중앙정부, 소유주, 계획 세우는 입안자, 수행하는 업체, 작업자, 건축당국, 각종 위원회가 협력한다.
에바씨는 “아주 중요한 것은 일일이 다큐멘터리(기록화)로 남기는 작업”이라며 기록해 미래로 전달하는 일은 중요한 작업이라 거듭 강조했다. 만약 소유주가 어떤 유적(성당이나 고성, 폐허) 개선하거나 수선하려면 연방유적청이나 주나 시를 찾아 위원회와 상담해야 한다. 재정후원은 중앙정부와 구시가지 보존담당이 공동으로 하며 연방의 지원액은 사실상 적은편이다.
미래전달은 몹시 어렵지만 아주 중요한 테마로서 문화유적이 갖고 있는 가치, 그 가치를 창출해 후대에 물려준다는 의미다. 대학에는 문화유적과가 있고 응용미술과에 복원과가 따로 있다.
복원 전문가의 위상에 대해서 에바씨는 “복원은 존중받는 오래된 직업이다. 복원이나 유적에 관련된 손수작업 하는 사람들을 특별양성한다, 작업자들도 전문교육을 받는다”고 했다.
-“모든 변화는 파괴를 전제로 한다”
1967년 구시가지법 제정 후 50년 동안 법 시행 후 항상 법은 확대 강화됐다. 구역 역시 확대됐다. 80년 초까지는 전면만 못 건드리게 했다면 법제 강화로 내부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있을 정도다.
빅토르 브로야키씨는 “법 확대 및 강화에 따른 주민 반발이나 민원이 없지 않다. 소유주를 대상으로 위원회가 중개하고 설득시키는데 바꾸고 싶어하는 이유를 듣고 유지함으로써 전체 시 모습이 어떨지 등을 설명한다. 몇 년씩 걸려 설득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는 ‘모든 변화는 파괴를 전제로 한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일축했다.
“파괴와 규제에 대한 보상은 기본적으로 하지 않으며 규제에 따르지 않을 경우 제재는 크지 않지만 벌금형이 부가된다. 원상 복구 조치시 비용이 훨씬 많이 든다는 점을 시민들은 알고 있다”면서 “신규 아파트 건설시 굳이 역사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지만 집과 집사이 하모니를 이뤄야한다. 1967년 구시가지 보호법 즉 문화재보호법이 있기 때문에 1996년 유네스코 지정 후 달라진 게 없다. 모차르트 축제 등으로 잘즈가 이미 유명했기 때문에 관광객 증가에도 별 영향이 없었다”고 했다.
빅토르씨는 “과거의 역사적 산물을 관광자원화 시킬 때는 남아있는 유적을 제일 먼저 조사 기록하고 전수해 공개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한다. 이 문화가 바로 우리 국민의 정체성이다”고 했다.
에바 호디씨는 이에 덧붙여 “구시가지 문화재는 우리 역사의 증언이고 우리 조상의 증언이다”고 재차 강조했다.
-크리스마스 카드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할슈타트’, 주민들 자체적으로 문화재 보존하겠다는 의지 강해
잘츠부르크를 떠나 잘츠부르크의 남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투명한 호수와 푸른 산으로 둘러싸인 잘츠캄머구트(소금이 무진장 묻혀있는 대지역)로 향했다.
‘잘츠캄머구트의 보석’이라 불리는 할슈타트 마을은 호수가 굽이굽이 이어져있고 산기슭과 호수변을 따라 집들이 있는 마을이었다.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풍경은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을 만큼 빼어나다. 어느곳을 둘러봐도 한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할슈타트는 환상적인 풍경을 자랑해 보는 이의 마음까지 벅차오르게 한다.
할슈타트의 ‘hal’은 고대 켈트어로 소금을 뜻하는데 예로부터 이곳에 소금광산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구가 채 1000명도 되지 않는 작은 마을 할슈타트. 할슈타트는 인류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7000년 된 역사 문화권을 가지고 있으며 3500년 전 소금광산을 운영했다. 이곳 주민들은 문화재 보존 의식이 남다르며 자체적으로 보존을 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고 했다. 1750년 마을 대화재로 많은 가옥들이 전소됐고 대부분의 집들은 이후 지은 것들이다.
이 마을 주민의 대부분은 민박업을 한다. 소박하고 느리게 살고 있는 자부심 강한 마을 주민들..., 작은마을 바트 이슐에서는 각종 콘서트와 연주회를 감상할 수 있고 백색 황금인 소금을 캐냈던 소금광산을 둘러보는 색다른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다. 1958년 강변도로 개설 방침에 주민들이 반발해 결국 마을길을 지키기 위해 터널을 뚫어야 했다는 이야기는 마을주민들의 자부심을 엿보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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