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인이 만족스럽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니듯이 한 도시나 국가의 변화 발전의 길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자로 재듯이 재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성주의자나 합의주의자의 주장과는 다르게 우리 개인이나 도시도 변화와 발전 과정에서 수많은 난관을 헤치며 그럭저럭 걸어가고 있는 모습에서 많이 다르지 않다. 이를 영어로 ‘groping along’이라고 한다.
개인이나 조직 모두 진흙탕 길을 걸어 쓰러지지 않고 그럭저럭 버티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경주가 길게는 수백 년 짧게는 지난 수십 년 걸어온 모습도 구름에 달 가듯이 걸어갔다 보다는 터벅터벅 걸어온 것이 아닌가 한다.
경주는 신라 천년 고도의 영광을 뒤로 하고 이후 늙고 낡은 도시로 이후 쇠퇴의 길을 걸어왔다고 하겠다. 한 도시의 모습과 미래는 지정학적 위치가 많은 것을 설명한다. 한반도 동남부에 자리한 신라의 수도였을 때에는 지리적 중심부로로서 손색이 없었지만 고려와 조선의 수도가 한반도 중심부에 자리 잡은 이후로는 지역의 중심 도시를 넘어서기 어려웠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경주는 상업과 공업 중심의 근대 산업화 과정에서도 중심축이 되지 못하고 계속하여 쇠락의 길을 걸어 왔다고 하겠다.
앞으로 100년 후의 경주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라 하지만 왠지 미래 경주의 모습을 내다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과학으로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걸어온 길을 회상해 보면 미래에 걸어갈 길을 어느 정도는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현학적 용어로 경로 의존성이라 하는데 과거가 현대와 미래를 결정한다는 상식적인 논리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오랜 동안 쇠락의 길을 걸어온 경주에서 이를 반전시킬 동인이나 변인을 찾을 수 있는가? 임기 4년의 지방 정치인들의 정치 구조에서 혁명과 혁신을 기대하기는 역시 어렵다. 행정 요식으로서의 그림이 아니라 100년 대계의 경주는 더욱 불가능해 보인다. 아예 미래 경주의 거대담론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나 보다.
경주 시민의 의지로 경주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전략적 선택의 기회가 방폐장 유치와 관련하여 2005년에 있었다. 물론 이도 월성 및 신월성 원자력 발전소와 관련되는 경로 의존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경주가 태권도 공원과 경마장 유치 실패 후 18년이나 정부가 해결하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해 온 방폐장 미끼를 꿀떡 삼켜버린 것을 보면 신라 천년 수도 특별 시민으로서의 긍지와 자존심은 다 어디가고 배고픔을 해결하는데 급했나 보다.
수도 서울에 방폐장 입지를 상상하기 어렵고 서울 강남에 쓰레기 매립장 건설을 논하기 어렵지만 쇠락한 도시인 경주에는 방폐장이 들어 올 수 있고 더 나아가 고준위 방폐장도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개인이나 조직을 포함하여 어떠한 주체의 삶과 미래를 결정하는 원리는 크게 두 가지 요소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자신의 의지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자신의 주체적 결정이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이와 상반된 주장은 세상은 우리가 주도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황 변수나 보다 커다란 힘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이지 개인이나 조직은 별 영향력이 없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경주에서는 후자의 논리가 작동되어 왔다. 천년 고도로서의 업보의 무게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