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젊은이 이야기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제법 잘했다. 영어와 수학을 특히 잘했고, 사색하거나 책 읽기를 즐겼다. 원하는 대학을 향해 꿈을 키워나간 것도 여느 학생과 같았다. 어느덧 대학 입학시험을 맞아 처음으로 상경한 그 시골 학생은 치기어린 자신감에 해당 대학 강의실 문을 힘껏 밀어 제친다.
‘시골에서 왔다고 깔보지 마라. 이제 이 학교는 내 학교다’ 뭐 이런 마음이었겠지. 그때만 해도 입학시험은 지원한 대학에서 직접 보던 때였다. 너무 힘껏 밀었던지, 여닫이식 문은 앞으로 활짝 밀리는 만큼 그 반동으로 냉큼 되돌아와 그 젊은이 왼쪽 어깨에 쾅! 하고 부딪친다. 그것은 전조(前兆)였을까,
그해 그는 시험에 떨어진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재수 끝에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갔지만 입학식 하는 그날 그는 이를 악물고 입대를 한다. 시간은 흘러 제대하는 날, 대학교 가을학기를 신청하지 않고 바로 일본으로 배낭여행을 떠난다. 누가 봐도 배낭여행객이라는 걸 증명하듯 꼬질꼬질한 행색의 그는 손에 일본지도를 든 채 횡단보도를 건너려던 참이었다.
한 2미터 즈음 건넜을까. 웬 단발머리 여학생이 옆을 지나 그 바로 앞에서 걷는다. 학교를 가던 길이었을까, 급하게 가는 걸보니 늦었나 보다. 때마침 매고 있던 가방 사이로 빨간 필통이 떨어진다.
“학생, 자 여기 필통 떨어졌어”하고 주워주는데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내가 이 필통 주워주려고 재수를 했었구나!”
이렇게 장황한 서두는 인연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 젊은이가 누군지도 눈치 챘을 테고 말이다. 생면부지 여학생의 필통을 주워주려고 필자는 일본에 갔고 그러기 위해서 먼저 군대를 다녀왔어야 했으며 필통 떨어지는 타이밍을 위해 재수(!)라는 형태로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그 뿐이었을까? 그 여학생도 모르긴 해도 그날따라 늦잠을 잤을 테고 허겁지겁 학교에 가느라 가방 지퍼를 잘 잠갔는지 확인도 못 했을테고...,
이렇게 ‘우연(偶然)을 가장한 필연(必然)’을 불교에서는 인연이라고 한다. 필통 주워주려고 필자는 군대를 가고 재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엉뚱하게 들리지만, 인과관계를 따져보면 지극히 근거있는 소리다.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도 같은 맥락이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과학이론 말이다.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E. Lorentz)가 생각해낸 이 원리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카오스 이론(chaos Theory)의 바탕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인연법(因緣法)의 맨 얼굴을 볼 수 있다. 결국 필통을 매개로 그 여학생과 만나게 되었으니 필연은 필연이다. 하지만 각 단계마다 전적으로 개인의 주관적 선택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그저 우연이라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필자가 손에 든 지도만 뚫어지게 봤더라도, 그 학생도 학교에 늦었으니 차라리 택시를 탔더라도, 그 상황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연은 이렇게 조건과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수많은 조건들이 입체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너무나 다른 결과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인연이 소중한 법이다.
위에서 언급한 나비와 태풍의 비유처럼 (원)인은 (결)과를 향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유위법(有爲法)이라고도 한다. 인과는 서로 상응[因果應報]함으로써 그 존재가치는 소멸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미 발생한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될 수 없다.
씨는 원인이라 싹을 맺지만 이미 활짝 핀 꽃은 결과로서 다시 꽃망울로 되돌아가지 못 한다. 만약 인과가 익어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인이 개입되거나 만들어지면 당연히 인연은 새롭게 전개된다.
여학생이 엄청 이뻤다면 그냥 필통만 주워주고 헤어졌겠냐는 말이다. 바둑이나 윷놀이는 떼만 잘 쓰면 물릴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인생에서 인연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좋은 인연의 씨를 뿌린다면 어떨까? 인과응보를 피할 수는 없지만 활용할 수는 있다. 적선(積善)하고 선연(善緣)을 쌓는 것은 종교나 도덕에서 늘 강조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