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 수영장에서 수영한 지 거의 세 시간 만에 육지(?)에 올라온 아들 녀석의 첫마디가 “아빠, 라면 사줘...” 라면 냄새 때문에 수영에 집중을 할 수 없단다.
그 넓은 수영장에서 아무리 킁킁대도 안 나는 냄새를 이 녀석은 맡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목적을 이뤘던지 냄새의 진원지를 가리키며 씨익 웃는다. 실내 수영장에 매점이 있는 이유를 도통 알 수 없는 아빠는 툴툴거리며 아들 뒤를 따라간다.
후각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 뇌에 빨리 전달된다. 시각세포는 각막의 보호를 받고, 청각세포는 고막의 보호를 받지만, 후각은 받아들이는 즉시 뇌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각은 시·청각에 비해 더 원시적이며 더 본능적이다. 아들 녀석은 저기 매점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냄새로 이미 파악을 한 것이다.
지금은 아빠보다 라면 냄새에 더 행복해 하겠지만, 아이가 정서적으로 안정되기 위해서는 ‘사랑의 냄새’에 충분히 노출되어야 한다고 한다. 엄마 아빠 냄새 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옆을 지켜주던 그 냄새는 유전적으로 100%의 적합성을 보인다고 한다. 아이는 엄마 냄새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고향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외할머니의 냄새는 어떨까? 맞벌이 부부를 대신해서 허리에 무리가 가도록 손주놈 업어 키웠건만 50%의 적합성만 보인단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얼르고 달래고 같이 있었지만 주말에 오는 아빠 엄마가 더 좋고 반갑다. 유전적으로 어쩔 수 없다.
손자 입장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무리 잘해주셔도 엄마 아빠에 더 끌리는 법이다. 어르신들도 이해를 좀 해주시길 바란다. 유전적으로 손자들 보다는 이래저래 속상한(!) 당신 자식이 더 끌리는 것도 사실 아닌가. 어쨌거나 유전적 접근성을 가리키는 용어인 근연도(近緣度)로 볼 때, 엄마나 할머니 냄새는 중요한 만큼 또 중요하지 않다. 근연도가 전혀 없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냄새가 정말 문제다.
한국은 아직 맞벌이 부모가 안심하고 사회생활을 하게끔 인프라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에 어린 것이 적응할 수밖엔 없는 구조라는 말이다. 그래도 정 붙이고 살겠다고 그 조그만 뇌 속에 도우미의 냄새를 기억하고 저장하려 노력한다고 한다. 유전적으로 짠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그 도우미 아주머니가 3개월, 5개월마다 바뀌는 경우다. 이제 그 냄새를 기억하고 정들려니 냄새가 바뀐다. 냄새가 바뀌고 목소리가 바뀐다는 것은 아이에게 아주 위험하다. 말 못하는 아이만 딱한 노릇이다.
엄마가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한 이런 불안감과 혼란은 계속 될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너무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 게 아닌가 생각도 든다. ‘직장맘’이라고 무슨 잘못이 있으랴. 냄새가 중요하단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필자에게도 기분 좋고 편안한 냄새가 있다. 내 엄마 냄새 말고도 말이다. 어릴 적 시골 외할머니 댁에서 맡아보았던 장작 타는 냄새며, 그 위에 된장 보골보골 끓이는 냄새며, 꺼먼 솥에서 흰 쌀밥 익어가는 냄새다. 왜 요즘 전기밥솥으로는 그 냄새를 만들지 못 할까. 고향의 그 냄새를 자극하는 밥솥이 나온다면 대박을 칠 텐데 말이다.
똑같은 오토바이인데 심장 맥박소리 같은 배기음을 특허로 내 아주 비싸게 팔아먹는 할리데이비슨(Harley-Davidson)이 그 상징적인 예다. 오토바이의 시끄러운 소리가 마음을 안정시킨다는 게 흥미롭긴 하지만, 유전학적으로 없는 말은 아닌 듯하다.
아무튼 수영장에서의 라면 냄새로 시작된 이야기가 심장(?)달린 오토바이까지 와 버렸다. 서로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지만 복잡한 스펙트럼 그 이면에 문화인류학적으로 유의미한 것은, 인간은 냄새 하나로도 행복을 느끼는 섬세하고 민감한 존재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