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도 먹는 이야기, 저기도 요리하는 프로다. 〈삼시세끼〉, 〈한食대첩〉, 〈집밥 백선생〉, 〈수요미식회〉… 지금 한국은 ‘먹방(먹는 방송)’, 또 ‘쿡방(요리cook하는 방송)’ 중이다. 뉴스나 노래 프로는 햄버거 사이에 낀 상추처럼 간신히, 그것도 아주 조금만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바야흐로 먹는 방송(이하 먹방)이 대세다. 먹방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등장은 인터넷 방송에서 시작된다. 아프리카 TV같이 개인이 하는 방송은 호스트가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들과 소통하는 구조다. 시청자들과의 실시간 소통이 생명인 인터넷의 생리상, 음식을 사이에 두고 마치 대화하듯 자연스레 콘텐츠로 축적되었고, 먹방은 새로운 방송 포맷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것이 영화로 옮겨가 소위 ‘하정우 먹방’이라는 신드롬으로 이어진다. 젊은 배우를 일약 스타로 만든 것이 먹는 장면이라는 게 참 재미있다. 그만큼 먹는 연기를 실감나게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먹방은 이렇게 우리의 정서를 자극할 그 무엇이 있다는 말이다. 음식을 만들고 먹는 행위는 사실 새로울 게 없다. 인류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일상일 뿐이다. 그런 먹고 마시는 일차적 행위가 마치 나훈아 디너쇼처럼 특별나고 기다려지는 이유는 그럼 뭘까? 남이 만들고 그걸 자기들끼리 먹는 걸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는 게 뭐가 재미있다고 온 국민은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는 것일까? 방송 매커니즘에서 답을 찾아볼 수 있다. 먹방이 방송 프로그램의 필수 아이템이 된 데에는 소위 ‘카메라 샤워’와 ‘방송편집’의 역할이 크다. 미세한 풍미조차 전할 듯 집요하게 대상을 클로즈업하고, 끝없이 입에 침이 고이게끔 요리 과정을 조각내고 또 붙인다. 방송 카메라의 위력이다. 하다못해 소고기 표면에 소금을 뿌리는 데에도 ‘허세’라는 문화로 포장한다. 깻잎김치 담구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과정과 과정 사이에 짭쪼롬한 이야기를 양념삼아 채운다. 방송 편집의 힘이다. 이들에 힘입어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어 소금을 뿌려주면 요리는 예술로 완성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허세부리지 않는 평범한, 요리사들은 불만이다. 그들은 이렇게 외친다. 요리는 예술이 아니라고. 우아한 미소를 머금고 스파게티를 마치 예술품 다루듯 하는 그들은 방송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고. 요리는 재료 손질에서 설거지로 이어지는 고된 작업의 반복이다. 온갖 허드렛일도 물론이다. 방송은 요리의 뿌리와 줄기는 외면하고 활짝 핀 꽃만 애써 클로즈업하고 있다. 하기사 보이지도 않는 뿌리와 가까이 보면 진딧물로 험악한 줄기에 관심을 기울일 사람은 없다. 힘들고 쓰라린 현실에 잠시나마 위로받고 재충전하는데 음식만한 것도 없다. 그러니 먹방으로 누이 좋고 매부 좋으면 된 거 아닌가? 시의적절하고 유의미하다. 먹방은 나름 그 순기능이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뭔가 뒷맛은 씁쓸하다. 먹방을 넋 놓고 보고 있으면 자꾸 불가사리 이야기가 떠올라 필자는 무섭다. 밥풀로 괴상한 짐승 모양의 물건을 만들어 재미삼아 바늘을 먹였더니 이놈이 점점 자라나 급기야 마을에 있는 모든 쇠붙이를 먹을 정도로 커져버린 괴물 이야기 말이다. 방송에서 셰프가 요리를 만들어내면 우린 그 프로그램을 받아먹다가 더, 더 달라는 그 배고픔에 결국 셰프마저 먹어치우는 꼴이다. ‘설탕’을 잘 쓰는 어떤 요리사를 하루아침에 스타로 만들었다가 그 요리는 식당용이지 집밥용은 아니라며 또 깎아내린다. ‘소금’을 멋지게 뿌리는 요리사를 치켜세웠다가 학력문제로 끄집어 내린다. 도대체 요리하고 대학졸업장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먹방 프로가 궤도를 이탈한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신기하게도 우리말에 ‘먹방’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먹물을 뿌린 것처럼 캄캄한 방이라는 뜻이란다. 시청률에만 목매는 방송국, 허기진 우리 시청자들, 요리로 웃고 우는 셰프, 이렇게 세 축은 지금 깜깜한 방 속에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