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신라 992년의 왕도(王都)이다. 세계 역사에서 하나의 왕조가 한 곳에서 1천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나라를 경영한 것은 유례가 드물다. 하물며 6부의 촌장들이 만장일치로 왕을 추대한 일이며, 세 성씨가 번갈아 왕위를 계승한 일, 그리고 여왕을 세 분이나 옹립한 것도 세계사 속의 관심꺼리다.
또 경주분지에 있는 4~6세기의 신라 무덤에서 출토되는 페르시아계, 유럽계의 장신구와 유리그릇, 칼, 토우 등은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특히 순금제 금관과 허리띠, 장신구의 출토는 일약 신라를 세계 속의 신라로 우뚝 세워 놓았다. 이제까지 세계 각처에서 발굴된 고대 금관은 13점 정도이며 그중 6점이 신라의 금관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경주의 금관 발굴사를 보면 일제강점기에 금관총 금관(1921년, 국보87호)을 시작으로 금령총 금관(1924년, 보물338호), 서봉총 금관(1926년, 보물339호)이 있으며, 해방 후 천마총 금관(1973년, 국보188호)과 황남대총 북분 금관(1974년, 국보191호)이 발굴되었고 진위 논란은 있지만 1969년 도굴되어 1973년 압수한 교동 금관이 있다.
이를 미루어 짐작컨대 만약에 경주시가지에 산재한 중대형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을 발굴한다면 금관은 무더기로 쏟아질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 경주에서 출토된 금관을 한자리에 모아서 나란히 전시한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합동 전시를 몇 번 시도한 적은 있지만 소장기관인 경주와 중앙(서울)의 두 국립박물관 사이 이해관계가 엇갈려 성사된 적이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금관총과 금령총, 서봉총 등 3기의 금관은 모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고 해방 후에 발굴된 천마총과 황남대총, 그리고 교동 금관은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이기에 그러하다.
올해는 광복 70주년 이며 국립경주박물관이 설립 된지도 7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이를 맞아 경주박물관에서는 이라는 특별전을 열고 있다. 그러나 신라 황금을 상징하는 6점의 금관은 이번에도 자리를 함께하지 못했다.
이제부터라도 경주에서 발굴된 유물 가운데 고향을 떠난 유물을 파악하여 경주로 찾아와야 하는 일이 우리의 몫이다. 그리하여 경주박물관에서 신라 문화를 상징하는 금관을 나란히 전시하는 일이 하루빨리 와야 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금관총 금관이 발굴되었을 때 이를 서울의 조선총독부박물관에 옮기려하자 당시 경주읍민들이 들고 일어나 반대운동을 펼쳤다. 경주고적보존회를 중심으로 헌금을 모금하여 금관고(금관총 출토유물 진열관)를 만들고 1923년 조선총독부에 기증하자 이를 모체로 1926년에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이 설치된 바가 있다.
그 당시의 경주사람 마음이 왜 지금은 되살아나지 않는 것일까? 근래에는 유물이 발굴되면 그 지역의 박물관이나 전시관에 소장, 전시하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신라를 대표할 수 있는 무수한 유물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서울의 조선총독부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으로 옮겨진 이래 지금까지 영영 되 찾아오지 못하고 있는 데는 경주사람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또하나 경주가 찾아야 할 일은 신라 금관의 문화재적 격이다. 국보는 보물에 비교하여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인데 금령총 금관과 서봉총 금관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금관총 금관은 일제강점기에 처음 발굴되었기에 국보로, 그다음에 발굴된 금령총, 서봉총 금관은 발굴년도가 늦어 보물로 격하 되었다고 전한다.
서봉총 금관을 살펴보면 다른 여타의 금관과 형태가 비슷하지만 아주 특이한 부분이 추가된 것을 알 수 있다. 나뭇가지 모양의 수식 안쪽에 머리를 감싸는 양대(梁帶)를 십(十)자형 띠로 둥글게 두르고 그 꼭대기에 금판으로 만든 봉황새 세 마리를 세워 놓았다. 당연히 국보로 격상되도록 찾아야 한다.
금령총 금관은 크기가 작아서 아마도 소년의 무덤으로 짐작하는데 특이하게 드리개에 금방울이 달려 있다. 교동 금관은 도굴된 유물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지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도굴범이 붙잡혔을 때 경주 교동에 위치한 신라 무덤에서 도굴하였다고 하였으나 아무런 지정을 받지 못함은 물론 진위 논란에 오르내리고 있기까지 하고 있다.
신라는 분명 황금의 나라였다. 그리고 동서의 문물을 교류한 육상 실크로드의 동쪽 끝이다. 가장 경주적인 것이 가장 한국적이라는 말이 있다. 경주, 신라의 역사는 우리 한민족 역사를 대변하고 있기에 그러하다.
신라로 하여 경주가 빛이 나고 경주를 통하여 신라를 제대로 볼려면 이곳에서 출토되어 타지역에 흩어진 유물의 소장처를 경주로 바꾸고 조속히 고향 땅으로 옮겨 오는 일이다. 경주 사람의 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