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 귀부(龜趺)의 목이 잘린 채, 혹은 비신(碑身)을 잃어 버린 채, 혹은 이수(螭首) 부분도 손상되고 망실된 채 신라 비석의 귀부들이 천년 세월을 처연하게 남아 있다. 한 기도 온전한 비석이 없을 정도다. 돌에 글자를 새겨 비석 주인공의 행적이 훗날까지 오래오래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또한 비석을 아름답게 꾸며 주인공의 삶과 업적이 더욱 빛나기를 기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비석을 아름답게 꾸미기 시작한 것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태종무열왕의 능에 있는 비석부터다.
신라인들은 삼국을 통일한 왕의 업적이 더욱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비석을 꾸몄을 것이다. 통일 신라 후기에는 화려하게 장엄한 비석이 절에도 세워지는데 특히 선종 사찰에 많았다. 선종은 스승의 법통을 잇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스승은 왕보다도 더욱 존귀한 존재였을 것이다. 스승의 빛나는 업적을 기리는 마음으로 비석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게 된다.
한편, 경주 지역의 귀부는 현재 태종무열왕비를 비롯해 13여 기의 귀부가 남아 전해지고 있다. 귀부는 비문에 의해 조성 연대를 알 수 있으므로 중요한 자료가 된다. 본 기사는 경주문화유적답사회에서 펴 낸 ‘경주의 문화유적(김환대 엮음)’에서 발췌하고 일부는 국립경주박물관 안내해설에 근거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귀부를 비좌로 삼게 돼
귀부란 거북 모양을 한 돌비석 받침돌을 일컫는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들어와 귀부를 비좌(碑座, 비신을 세우는 대좌 또는 비신을 꽂아 세우기 위해 홈을 판 자리)로 삼게 된다. 그 이후 조선시대에 걸쳐 석비의 전형적인 형식이 됐다.
통일신라시대 8세기에는 거북 머리 모양이 용머리 형상이 되며 9세기 이후에는 대부분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귀부의 조각 수법도 사실적인 수법에서 추상적인 형상으로 변한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이어받아 용의 머리에 거북의 몸을 표현했으나 12세기에 들어서서 귀부 형태의 비석 받침돌이 대석 형태로 변하면서 차츰 귀부는 없어진다. 조선시대에는 고승의 탑비를 비롯해 신도비와 묘비에도 일부 세웠다. 공적을 새긴 비석으로 인식된다.
각 귀부는 선도산 앞의 태종무열왕비와 김인문 묘 앞 서악리 귀부, 성덕왕릉 귀부, 흥덕왕릉 귀부, 고선사지 서당화상탑비 귀부(국립경주박물관 내), 사천왕사지 동,서 귀부, 창림사지 귀부, 황복사지 귀부, 숭복사지 귀부(국립경주박물관 내), 무장사지 아미타 조상 사적비 이수 및 귀부 등이 있다. 태종무열왕비 귀부에 대해선 지난 1195호(경주 재발견 79회)에서 상세하게 다룬바 있어 생략한다.
-고선사지 귀부
원효대사의 손자 설중업이 원효대사를 기리며 고선사에 세운 서당화상비의 비석 받침이다. 거북을 닮은 머리 부분은 없어지고 몸통 부분이 남아 있다. 등 부분의 귀갑무늬는 희미하고 등의 가장 자리를 따라가며 일정한 폭의 무늬띠가 확인된다. 등 가운데 비신을 세우기 위해 턱이 있는 네모난 홈을 만들었고 홈 주위를 돌아가면서 연꽃무늬를 새겼다.
1914년 고선사 터에서 글씨가 새겨진 아랫부분이 발견되었고 윗 부분은 1968년 동천동 민가에서 발견됐다. 이 윗부분이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중이다. 현재 남아 있는 비신의 명문은 원효 대사의 사상과 업적을 적은 것으로 비문은 33행이며 각 행은 61자로 추정된다.
-숭복사 쌍거북 비석 받침...쌍거북 비석 받침은 창림사터와 암곡동의 무장사터에서도 찾아 볼 수 있어
두 마리 거북이가 붙어 있는 이 비석 받침은 외동음 말방리 숭복사터에 있던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원성왕의 능은 토함산 골짜기 곡사(숭복사) 에 있으며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어주던 사찰이라는 것과 그곳에 있던 비문을 최치원이 지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쌍거북 비석 받침은 배리에 있는 창림사터와 암곡동의 무장사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면 왜 다른 귀부와 달리 쌍거북 받침일까. 한 가지 유추 해볼 수 있는 것은 이 세 절 모두 신라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이고 창림사 일대는 박혁거세가 세운 신라최초의 궁궐터라고 알려져 있으며 무장사는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를 숨겼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다. 아마도 신라인들은 왕실과 관련된 비석을 더욱 화려하게 꾸미고 싶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악리 귀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 무덤에 가까워서 김인문 묘비의 대석으로 알려지고 있다. 귀갑무늬를 새긴 거북등에는 비석을 꽂았던 흔적인 직사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귀부는 용두화 되기 전의 귀두의 원형을 지니고 있어 한국 석비 대석의 시원적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목을 길게 빼고 멀리 앞을 내다보는 기상은 통일 신라 초기의 호국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다.
-성덕왕릉 귀부
성덕왕릉 옆 논밭둑에 큰 거북 모양의 귀부가 있다. 처음 보는 이들은 그 크기에서 한 번 놀랄 정도로 매우 크다. 지금은 비대좌인 귀부만 남아 있다. 거북 머리의 귀두는 없어지고 등에 전체적으로 6각형의 귀갑문이 남아 있다. 거북 등의 귀갑무늬나 기타 당초문 등을 통해 왕릉에 사용된 귀부 제작 양식을 일부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의 유물이라 할 수 있다.
-흥덕왕릉 귀부
안강에 위치한 이 귀부는 흥덕왕릉의 전방 왼쪽에 능에 관한 석비를 세웠던 받침돌인 귀부가 남아 있으나 손상이 아주 심하고 비신과 그 위에 놓인 이수가 없어져 버렸다. 1977년 국립경주 박물관과 사적관리사무소의 발굴 조사시 상당수의 비편에서 흥덕왕릉임을 입증하는 비편이 발견돼 흥덕왕릉임을 입증하게 되었다.
-사천왕사지 귀부
머리가 잘린채로 석조 귀부가 도로변에 가깝게 놓여 있다. 이런 귀부가 동과 서로 2기가 있는데 이 귀부는 모두 비좌 주변의 연화문과 귀갑문, 당초문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무장사지 귀부
암곡동 골짜기 깊은 숲속에 있으며 이수에는 ‘아미타불’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두 마리의 거북이가 쌍귀부로 표현돼 있으며 목은 잘려 나갔고 발가락 조각이 비교적 정교한 편이다.
거북의 등에 얹혀진 비석 받침대 네 면에 특이하게 십이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잘린 이수는 용이 앞발로 여의주를 잡고 있는 형상으로 살아있는 듯한 생생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현재 깨어진 비신을 다시 복원해 세워 놓았다.
-창림사지 귀부
배동의 창림사지 쌍귀부는 경주 남산의 서쪽 자락 소나무 숲 속에 민묘옆에 있다. 오른쪽 귀부는 앞의 두 발 중 가운데 한 발은 땅을 딛고 있으며, 또 다른 발은 앞으로 가기 위해 뒤로 젖히고 있는 모습이다. 왼쪽 귀부는 한 발은 땅을 딛고 또 다른 발은 뒤집혀져 있다. 이 모습은 기어가다 발을 멈춘 형태인데 움직이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조각한 것이다.
또 머리는 정면을 보지 않고 약간씩 방향을 달리하고 있어 경직되지 않은 자연스런 모습을 보여준다. 창림사지 귀부 비문에는 신라의 명필 김생(711~791)의 글씨가 있다. 이로 미루어 볼때 이 귀부는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창림사지 쌍귀부 중 한 마리의 머리가 전시되어 있는데 머리를 거의 직각으로 들어 올린 데다 목을 뒤로 젖혀 입을 크게 벌리고 구슬을 물고 있는 형상이다.
-내남면 이조리 귀부
내만면 이조리 용산 서원 입구 최진립 장군 신도비각 안에 있으며 태종무열왕 귀부와 형식이 거의 같다.
-구황동 당간 지주 귀부
황룡사지와 분황사 사이에 있으며 분황사 소유의 것으로 여겨지는 이 지주는 머리를 동쪽으로 향한 귀부가 있어 특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