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광고의 만남이라 어째 연결이 잘 안 된다. 하나는 25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면, 다른 하나는 상업주의의 꽃으로 보다 많은 소비를 촉진하는 게 제일 명제다.
종교로서 불교를 ‘본질’과 ‘의미’라는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광고는 ‘필요’와 ‘욕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앞의 것이 ‘가치(價値) 추구적’이라면 뒤의 것은 다분히 ‘화폐(貨幣) 추구적’이다.
노는 물이 다르니 당연히 그 공통분모를 찾는 게 실익이 있겠나 싶다. ‘맘모스와 가스레인지’와의 비교처럼 낯선 두 거대담론의 연결은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여기 한 컷의 광고가 있다.
Natan社라고 반지 만드는 회사의 비교 광고다. 얼핏 봐도 남자가 여자에게 포로포즈 반지를 건네는 장면인 것 같은데, 재미있는 것은 동일인으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는 사실이다.
정황상 좌측의 남자 얼굴이 불행히도 진짜일 것이다. 현실은 주로 아프고 슬픈 법이다. 눈썹은 일자로 붙어있고, 코와 입 등 전체적인 조화로 볼 때 잘 생긴 얼굴은 아니다. 그런 남자가 반지 케이스를 여자에게 권한다.
오른쪽 사진에서는 프로포즈 받는 여성의 손도 보인다. 그 손에 들려있는 반지를 확인하고 다시 보니, 일자 눈썹은 어디 가고 웬 장동건이 떡~ 하니 앉아 있더라, 뭐 이런 식이다. 요약하자면, ‘반지의 크기에 내 남자 얼굴이 달라진다!’ 정도의 지극히 상업적이다. 남자 얼굴까지 바꿀 수 있는 반지의 위대함이란 보석의 알 굵기에 정비례한다. 여기까지 왔다면 광고는 충분히 메시지를 전달했다.
자, 이미 해독 끝난 광고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왼쪽의 일자눈썹은 도대체 누가 보고 있을까? 당연히 프로포즈 받는 여성일 테다. 오른쪽 반지 케이스를 열어보는 그 여성 말이다.
그렇다면 왼쪽 남자를 쳐다보는 시선은 그 여성이 유일할까? 이것이 이 광고의 반전 포인트다. 불특정 다수인 우리 또한 그 여성의 눈으로 왼쪽 남자를 보고 있다. 우리 모두가 저 여성과 동일인이다. 저 여성의 인식을 우리 모두 공유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건네준 반지 케이스를 열자, 마치 새 남자인양 남자 인상이 바뀌었다. 케이스만 슬쩍 열었을 뿐인데, 어떻게 ‘영구’에서 ‘장동건’으로 바뀔 수 있냐는 거다. 인식의 총체적 전환,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말이다.
불교에서 이 경우에 잘 쓰는 말이 있다. ‘일체의 법은 인연으로 인해 생기고(諸法從緣起), 그것은 또 인연으로 인해 없어진다(彼法因緣盡). 쉽게 말해 조건(인연(因緣))에 따라서 일체의 현상(법(法))이 생겼다 없어진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연기법(緣起法)이라는 것이다. 더 쉽게 풀어보자. 반지 케이스 뚜껑이 딸깍! 눈에 확 들어온 반짝이는 반지, 그 크기 등이 조건이다.
일자눈썹이나 장동건은 변하는 인식의 내용이고. 조건이 바뀌니 일자눈썹은 멋진 갈매기 눈썹으로 변한다. 바로 여기가 광고가 불교와 만나는 지점이다. 우리가 이 광고를 보자말자 씨-익 웃을 수 있었던 것은, 불교 인식론은 몰라도 영구를 장동건으로 만들 수 있는 게 결국 ‘마음’이란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