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을 알리고 지키는 일을 소임으로 맡기는 신이 있다면 아마도 (사)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61) 소장을 점지했을 것이다.
경주 남산에 바친 그의 열정적 땀의 결실이 제27회 경주시 문화상으로 더욱 옹골차지고 공고해졌다. 지난 5일 찾은 소박한 그의 연구소에는 역사서와 관련도서와 자료들로 넘쳐났다.
김 소장의 경주남산에 대한 해박한 해설력은 물론, 깊은 인문학적 소양의 근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는 문화재 보호 및 보존 활동, 남산문화유적답사강좌 개설 등을 통해 경주 남산의 문화적 가치를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서 왔다. 지역안정유공, 국가사회발전유공, 국립공원관리공단이사장 표창 외 다수의 표창을 받은 김 소장의 그간 활동과 소회를 들어 보았다.
#남산 사나이 김구석
“제가 해 온 일이 지금도 그렇지만 나 혼자 한 일이겠습니까. 선배들이 글로써, 삶으로써 지도해줬고 많은 동료와 후배들, 같이 일해 온 많은 이들이 함께 했고 도와주어서 이 상을 대표로 수상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남산 지킴이 70여 명과 같이 일하고 이전의 경주불교학생회, 경주불문회, 부처님마을 등의 일을 거치면서 경주남산연구소 회원들과 함께 일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이 그래도 ‘지역 사회에 해 끼치지 않고 덕이 됐구나’ 하는 생각으로 기쁘고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울산서 공무원으로 승승장구 했지만 고향에서 남이 하지 않은 일, 하고 싶은 길을 걷다보니 남산 사랑의 외길을 걷게 됐다고.
“남산 답사를 다니면서 형상적으로는 경주 남산의 불상과 탑을 알리는 운동을 했고 사상적 신념의 활동으로는 남산의 파괴된 불상과 탑을 공부했습니다. 80년 초 고청 윤경렬 선생의 ‘경주남산고적순례’라는 책의 복사본을 끼고 다니면서 남산을 골골이 찾아다니게 됐습니다”
김 소장은 당시 처음부터 슬라이드 필름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89년 대원사의 ‘빛깔있는 책’ 경주 남산편에서 고청 선생의 글과 함께 경주 남산 사진을 제공하면서 참여했다. 이로써 남산 사나이로 급부상한다.
“‘남산 잘 아네! 잘 아나? 잘 안다!!’ 이렇게 되니 잘 아는 값을 해야했지요. 하하. 그러니 공부도 더욱 열심히 했고 그렇게 남산과의 인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던 것 같습니다”
#경주 남산의 지킴이로 누군가 해야 할 일을 했고 하고 있을 뿐
경주남산의 미학과 종교성을 말하는 그의 눈에는 남산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했다. 남산과 김구석은 이제 뗄레야 뗄 수 없는 한 덩어리의 고유명사다. 경주남산의 아름다움은 남산 자체의 신령한 자연과 인간(인공)의 조화에서 우러나온다며 그래서 가치있고 아름답다고 강조했다. 시종 겸손한 자세를 견지하는 그의 성품이 오늘의 그를 있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있어야 될 그 자리에, 불상이나 탑이 아니면 어울리지 않는 곳에 예술품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공부를 깊이 한 미술학자는 아닙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을 했고 하고 있을 뿐입니다”고 했다.
그간의 애환이 왜 없었을까마는 ‘애환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남산에 불상이나 탑이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라의 역사가 시작됐기 때문에 중요한 산이 아니라 이미 신성한 곳이었으므로 신성한 분이 택해서 탄생했다고 생각합니다. 불상이나 탑이 그렇게 많은 것은 우리 민족의 하늘을 경배하고 자연을 숭배하던 신앙 중에서도 산신, 바위의 신이함에 대한 태생적으로 믿어왔던 고유한 신앙이었습니다”
남산은 태고로부터 신성한 산이었다는 것. 이것에 불교가 유입되면서 습합됐던 것이라 했다. 바위 속 부처나 신을 찾아냈고 이들이 자연과의 조화로 아름다움을 빚어낸 것이라 강조했다.
그는 남산지킴이로서뿐만 아니라 충담재, 월명재, 정월대보름축제 등에도 발안을 했던 것이다.
“‘부처님마을’ 사무국장 할 당시 1989년 충담재를 시작했고 이후 문화축제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취지로 종교색을 벗은 충담재로 거듭났습니다. 월명재를 발족시켰고 추진위원회로서 경주문화축제 위원회를 발족했습니다. 그 당시가 30대 중반이었으니 젊었을때였죠. 지금까지 월명재와 정월대보름 축제는 경주문화축제 위원회에서 진행하고 있지요”
“요즘 일주일에 수업을 여덟 번 해요. 가장 오래된 수업으로는 인기를 끌고 있는 ‘경주문화재답사반’을 15년간 해오고 있습니다. 2000년부터 해온 ‘남산유적답사반’, ‘경주남산지킴이들심화교육’ 등입니다” 그의 강의는 헤아리기 어렵다. 경주 문화유산해설자 중 김 소장의 강의를 거쳐간 이가 절반 이상이다.
#‘경주남산세계문화유산 지정 촉구를 위한 시민위원회’를 조직해 ‘등재’라는 성과 도출하는 데 적극적인 힘 보태
사단법인 경주남산연구소는 1984년 발족된 남산사랑모임과 1999년 발족한 남산연구소가 2002년 경주남산연구소로 통합해 힘을 합하게 되었고, 2012년 사단법인으로 등록하게 된다. 2001년 남산 앞에 텐트를 설치해 안내소를 만드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현재 활동 중인 남산 지킴이가 약 70여 명 정도고 거쳐간 이들을 합하면 180여 명 정도라고 한다. 초창기 강좌는 거의 무료로 시행했다.
남산 안내소를 운영한 것도 15년 정도인데 여기를 거쳐 간 이도 180여 명, 그들이 일한 날짜가 약 6000일 정도 된다. 이들 중 봉사 1000시간을 한 두 명에 대해 올 봄, 표창을 한 바 있다.
“중요한 문화유적을 6군데로 요약하자면 경주남산에서 가장 많은 유적이 있는 곳으로 삼릉골, 동남산 산책, 서남산 코스, 남남산 코스, 삼릉가는길 등으로 6개 코스를 모두 참여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김 소장은 경주남산 유네스코 지정에 대해서도 민간단체를 조직해 활발한 운동을 펼친 바 있다. 서울의 한국유네스코위원회에 유네스코지정을 위한 절차나 과정을 문의해 발안했던 것.
경주남산세계문화유산 등록이 지지부진해 1997년 12월부터 ‘경주남산세계문화유산 지정 촉구를 위한 시민위원회’를 조직해 준비 작업을 두 세 달 정도 하면서 문화재청에도 지정에 관한 다양한 근거를 제시해 드디어 2000년 등재라는 혁혁한 성과를 도출하는 데 적극적인 힘을 보탠 것이다.
#앞으로도 유적의 보존과 복원, 홍보에 관한 사업 계속해 나갈 것
“경주시에서 적은 강사료를 들여도 문화유산 강좌를 많이 개설 할 수 있습니다. 경주시민을 끌어들여 문화유적답사 프로그램을 흥행시킨다면 결국 경주시민들의 문화유산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지고 아끼는 마음이 강해질 것입니다. 이로써 결국 경주시의 핵심 사업인 왕경복원 등의 후원 세력이 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후배였지만 작고한 경주대 이근직 교수에게 많이 배웠다며 겸손함을 잃지 않는 김 소장은 지금도 경주문화유산 원전강독을 회원들과 함께 하고 있는 학구파다.
남산은 우리 겨레가 알아야 하고 지켜야 할 소중한 산이다. 이 산에는 겨레의 꿈이 어린 신화가 있고, 겨레의 종교가 숨쉬고 겨레의 예술 문화가 깃들어 있는 역사의 산이다. 남산에 문화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남산 자체가 그대로 문화재인 것이다.
“그러나 수천년 흐르는 세월에 시달려 풍화되고 마멸되고 무너지고 묻혀져 지금이라도 기록해 놓지 않으면 제대로 보존하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사단법인 경주남산연구소는 유적의 보존과 복원, 홍보에 관한 사업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