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무열왕릉과 서악리 고분군으로 가는 길에는 초여름 하늬바람이 살갑게 불었다. 마치 이승의 한 켠에서 살짝 비켜난 듯한 이채로운 고요가 능 전반에 흘렀다. 서악리 고분군의 피장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채 의연했다. 태종무열왕릉은 왕릉임에도 매우 검박하고 고졸했다. 경주의 수많은 문화유산 중에서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고분이다. 경주의 155개 고분 중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 천마총과 김유신장군묘, 원성왕릉 등의 고분들과 함께 태종무열왕릉도 그 목록에 추가된다고 한다.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것은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긴 하지만 약 12%에 불과하다고 하니 능비(陵碑)의 머릿돌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王之碑)’라는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어 무덤의 주인이 확실히 밝혀진 능으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는 능이었다. 능역이 넓고 시야가 확 트여 능역에 들어서자, 봉분의 연초록색이 무열왕릉을 비롯한 4기의 무덤에서 선연했다. 능의 입구 오른쪽에 있는 능비에는 조각가의 힘찬 기상이 느껴진다. 강석경 작가는 ‘경주 산책’에서 서악리 고분군을 ‘네 개의 능선이 고래등같이 매끄럽게 솟아 있다. 걸음을 옮기면 능들이 하나하나 다가와 숨바꼭질하는 것 같다. 180여 년 전 추사는 이곳에 들러 신라왕릉 연구보고서라 할 ‘진흥왕릉고’를 남겼는데 경주 김씨의 후예로서 어떤 감회를 가졌는지 궁금하다’고 썼다. 본고는 경주시가 발행한 ‘천년고도 경주’에서 인용, 발췌했다. 또 문화관광해설사 박순호 씨의 해설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무열왕릉...명문(銘文)으로 신라의 역대 능묘 중 피장자 명확한 유일한 능묘 김유신 장군의 적극적인 지지로 진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김춘추. 그가 바로 29대 태종무열왕이다. 그는 특히 외교에 능숙해 당나라와의 연합을 성사시키고 백제를 멸망시키면서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에 성큼 다가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신라에서 처음으로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고분의 주인이 하루 식사로 쌀 서 말, 수꿩 아홉 마리를 먹었다’고 할만큼 기골이 장대해서일까. 고분은 별다른 장식없이 봉분이 매우 크다. 장식없이 규모가 큰 신라 초기의 능으로는 마지막이라 할 수 있고 무열왕릉 이후에는 호석을 세우는 등 화려한 능 양식이 등장한다. 서악동에 있는 사적 제20호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릉은 미발굴분이며 구조는 횡혈식석실로 추정된다. 태종무열왕릉은 서악동 구릉의 동사면에 세로로 나란히 5기의 대형 원분(圓墳)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시대 능묘의 분구 언저리에는 잘 다듬은 돌로 호석을 돌리고 여기에 동물머리에 사람 몸을 한 십이지를 배치하거나 다시 석책을 돌리고 있다. 이에 비하면 무열왕릉의 봉분장식은 소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열왕릉의 경우에는 왕릉 앞 쪽에 무덤의 주인을 밝히는 비가 세워져 있고 머릿돌에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어 무덤의 주인이 확실히 밝혀진 능으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 명문에 의해 무열왕릉이 신라의 역대 능묘 중 피장자가 명확한 유일한 능묘가 되었다. -신라 조각의 정수, 삼국 통일 이뤄내고 막 비상하려는 국가의 당당한 기상 보여주는듯 능의 전방 동북쪽에 능비가 있으나 현재는 귀부(龜趺)와 이수(碑首)밖에 남아 있지 않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비신은 조선시대까지는 잔존했던 것 같다. 능비의 몸체는 사라지고 비석 받침돌(귀부)과 머리 장식돌(이수)만 남아 있는데 이 머리 장식돌 중앙 부분에 ‘태종무열왕지비’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귀부의 네 발과 머리의 표현은 생동감이 넘쳐 있어 신라 조각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당대의 명문장가이자 명필가였던 무열왕의 아들 김인문이 썼다고 전하는 전서체 글씨다. 비석 받침들의 거북이는 살아움직이는듯 힘차고 사실적인 조각 수법만으로도 주목을 끌고 있다. 목을 높이 쳐들고 힘차게 뻗으며 앞으로 전진하는 형상이으로 삼국 통일을 이루어내고 막 비상하려는 한 국가의 기상을 보여주는듯 하다. 거북 등에는 6각의 귀갑 무늬가 뚜렷하고 바깥 부분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했다. 머릿돌의 좌우에는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세 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다. 문화관광해설사 박순호 씨는 “이 비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권 최대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통일 신라 이후의 사회 문화 군사력의 당당함을 표현하고 있다. 먼 산을 바라보며 뚜벅 뚜벅 앞으로, 느리지만 당당히 전진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등으로 미루어 거북의 생태를 잘 아는 석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의 코에서는 마치 영기(靈氣)가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거북의 화려함은 태종무열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하나의 대변물이다”고 했다. -그렇다면 거북의 귀부와 이수는 왜 석질이 다를까? 박 해설사는 “귀부와 이수는 동시대의 조각으로서 석질이 다른 것은 이수부분은 용 여섯 마리가 여의주 하나를 두고 희롱을 하는 모습을 새긴 것으로 연질암(안산암으로 추정)으로 조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심한 조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단단한 화강암보다는 복잡한 조각을 디테일하게 하기 쉬어서 암질을 달리해서 표현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사라진 비신은 길이 1.8미터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이 남아 있는 왕릉은 이곳과 성덕왕릉과 흥덕왕릉 정도다. 사라진 비석의 비편은 30여 년전 태풍으로 인해 서원의 담이 무너지면서 다량의 비편이 발견되었는데 글씨체가 이 곳 능비의 전서체와 거의 흡사했다고 한다. 비편은 수습된 이후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중이라고. -서악리 네 기 고분군...우리의 장묘 정서상 태종무열왕 가계 최고 어른들 무덤이라고 추정 서악리 고분군은 무열왕릉 바로 뒤편, 경사진 구릉위에 산 같은 고분 네 기가 솟아 있다. 경주 시내의 여느 고분들과는 달리 장중한 위용이 느껴지는 큰 고분군이다. 차례대로 능선이 겹쳐지면서 아스라한 풍광을 자아내는 고분들의 늘어선 모양새가 무척이나 운치있다.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없으니 맨 위부터 1호, 2호, 3호, 4호 분이라 부르기도 한다. 23대 법흥왕, 24대 진흥왕, 25대 진지왕, 무열왕의 아버지 용춘(문흥대왕) 등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 이들 무덤들은 발굴 조사를 하지 않아 내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 왕릉 가운데서도 큰 편에 속하므로 왕의 무덤이라는 추정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문화관광해설사 박순호 씨는 “우리의 장묘 정서상 태종무열왕 가계의 최고 어른들의 무덤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위치적으로 무열왕릉보다 윗부분에 있기 때문이다. 이 고분군 터는 선도산(일명 서형산)자락에 있으며 ‘매몽 설화’ 이야기가 딱 맞아 떨어지는 형상이다”며 “이 터는 금계포란(금빛 찬란한 닭이 알을 품었다) 형으로서 매우 명당이다. 또 배산임수형으로 뒤에는 선도산이, 앞으로는 형산강이 흐른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관광객이나 시민들은 이 고분군의 끝까지 가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이 고분군이 성역화 된 것은 1973년으로,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어서 아쉬웠다. 그 대안으로 신라 전돌 같은 느낌의 길로 포장되었으면 더욱 신라적이겠다 싶었다. 4기의 고분군 중에서 고분군 절반 즈음에 올라서 보니 남산, 토함산, 서형산이 바라보여 이 산이 신라 당시 성산이면서 중요한 산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열왕릉 맞은편에는 두 기의 무덤이 더 있었다. ‘김 양’이라는 자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김 양은 김인문의 아들이므로 무열왕의 손자이다. 또 아들 김인문 묘가 있어 무열왕릉과는 일직선 상에 무덤이 있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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