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 밖을 포함하고 있어서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 없고 큰 소리가 천지 사이에 진동하지만 그 울림은 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쉬운 말로 비유하면 삼진의 오묘한 뜻을 알 수 있고 신종의 소리를 들어야 일승의 원음(圓音)을 깨닫습니다’ -이하 하략-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명문의 이 국역문은 2012년, 종명을 촬영하고 판독한 결과를 기초로 소당 조철제 선생(인물사진·현재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경주문화원))이 국역한 것이다.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이하 ‘신종’)은 만들어진 지 1250년이 된다. 신라문화유산 가운데서도 성덕대왕신종은 가장 뛰어나고 완벽한 작품으로 꼽힌다. 특히 신종은 아직 음질과 문양 및 동체에 특별한 이상이 없는 상태로서 신라 전미(全美)를 자랑하고 있다. 소당 선생의 최근 발간한 책 ‘또 다른 경주를 만나다’(도서출판 선)를 근간으로 선생의 자문을 엮어 신종에 대해 살펴보았다. -음질과 문양 및 동체에 특별한 이상이 없는 상태...신라문화유산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나고 완벽한 작품 신라인의 사상과 종교, 예술과 과학 및 장인 정신이 응집돼 완성된 신종은 민족 문화의 우수성과 신라인의 자존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754년(경덕왕13), 황룡사의 거대한 종을 제작했던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통일신라 전성기때 제작된 신종은 당대 최고의 석학과 과학자 및 기술자가 총 동원돼 20여 년간에 걸쳐 완성된 결정체다. 신종이 주성될 시기 신라인의 예술문화적 수준과 오랜 경험과 축적된 기술력은 최고조에 다다랐음을 알 수 있다.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완성은 혜공왕 때인 771년에 이루어졌다. 신종에는 전체에 아름다운 유곽선과 보상당초문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으며 이 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것이 비천상 한가운데 새겨진 종명이다. “신라 패망후 경주는 황량하기 이를데 없었을 것이다. 신라의 강성했던 세력은 기울고 그 폐허 위에 거의 방치됐을텐데 이렇게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신종은 이렇듯, 신라인의 종 제작 기술이나 장인정신의 백미로서 오늘날 우리의 육안으로 읽을 수 있다는 자체가 감동적이지 않은가”고 했다. -신종의 명문은 장중하면서도 유려, 신라 한문학의 정수로서 자긍심 가져도 충분할 명문장 성덕대왕 신종은 좀 더 본질적인 접근보다는 후세에 전해지고 있는 에밀레 종, 인신 공양설, 종소리의 신이함, 비천상 등의 중심으로 더 알려져 있다. 소당 선생은 “그동안 종의 본질성보다는 전설이나 주변의 떠도는 이야기가 주류였다. 신종 명문의 깊이있는 접근시도가 부족해 안타까웠다. 우연한 기회에 신종의 명문을 접하게 되었고 신종 종명은 종이 주조된 역사적 배경등과 함께 명문(名文) 가운데 명문이며 신라 한문학의 정수임을 알게 됐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 놀라웠고 안타까웠다. 이를 더욱 널리 알리기위해서는 내용을 더욱 정확하게 분석하고 좀 더 쉽게 번역해 다시 신종의 명문을 가깝게 읽는 계기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신종 종명은 전면의 서문(序文)과 후면의 명문(銘文)으로 구분되고 후면 뒷부분에 주종(鑄鍾)참가자의 관명과 인명이 적혀있다. 서문은 659자, 명문 214자, 주종 관계자의 관직과 성명이 160자로서 모두 합하면 1033자다. 이를 통틀어 종명이라 일컫는다. 종명을 최초로 판독한 기록은 1530년(중종 25)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편이다. 신종이 만들어진지 759년이 지난 시점이다. 이때 경주부에서 종명을 비로소 판독해 ‘봉덕사종(奉德寺鍾)’ 편에 넣어 실었다. 종명의 주제는 성덕왕의 공덕을 종에 담아서 대왕의 공덕을 기리고, 종소리를 통해서 그 공덕이 널리 나라의 민중들에게 흘러 퍼지게 해서 국태민안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발원이 담겨 있다. 중국의 명문인 적벽부, 굴원의 어부사, 귀거래사 등은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는데 비해 우리나라의 명문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소당 선생은 “특히 신라의 고전 명문은 몇 편 없는 가운데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은 유가, 불교, 도가의 삼교교리가 자연스럽게 융화돼 있다. 마치 표 없이 매끈하게 바느질한 것처럼,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명문장으로서 장중하면서도 유려하게 적고 있다. 경주의 문인들부터 이 신종의 명문을 되새기면서 외우고 다시 읽을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 “도입, 본론, 결론 단계로 잘 마무리 되어 있다. 문장의 구성력 즉, 문장의 힘은 전형적인 한문 창작의 변려체가 주다. 이 변려체 댓구 형식은 작가의 문장력이 풍부하고 실력이 출중하지 않으면 짓기 어려운 것이어서 참으로 놀라운 문체이다. 자긍심을 가져도 충분할 명문장이다”고 했다. 신종의 오랜 제작기간, 축적된 기술, 후원, 위정자의 의지 등을 아울러 나타난 것이 명문 속에 오롯이 담겨져 나타나 있는 것. -종명 지은 찬자(撰者)는 김필월이나 김필해 아닌 ‘김필흥(金弼興)’ 조철제 선생은 신종 종명의 글씨를 정밀 사진판독한 결과 지금까지 판독본 중 20자의 오자를 발견했다. 이번에 오자로 판독된 글자 중 특히 서문의 ‘앙유대군(仰惟大君)’에 ‘대군(大君)’은 ‘태후(太后)’로 오독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종명 중 글을 지은 찬자(撰者)의 이름이 ‘김(金)’자와 ‘필`(弼)’자는 분명하지만 마지막 글자가 마모돼 모호했다. 삼국유사에서는 ‘월(粤)’자를 썼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해(奚)’자로 읽었기 때문에 후세 많은 학자들이 이를 따랐다. 즉 찬자를 김필월과 김필해로 읽었으나 소당 선생은 김필흥(興)으로 읽었다. 종명에는 금석문 특성상 흥자를 약자로 썼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종명에 찬자 이름이 세 번 보인다. 고감도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서 나타난 자형은 거의 ‘흥(興)’자이고 성명의 문의를 보아도 ‘해(奚)’보다 ‘흥(興)’자가 뜻이 더 좋다는 견해다. 지금까지의 명문 판독 결과를 모두 모아 비교 검토해 본 결과기도 하다. 따라서 종명의 찬자는 ‘김필흥(金弼興)’으로 보인다고 했다. 종명을 지은 김필흥은 삼교 교리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뛰어난 문장가였다. 신종의 종명은 신라 불교가 꽃을 피운 시기에 당대 최고의 문사가 지은 명문으로 꼽힌다. 소당 선생은 “신종에 새겨진 종명은 신종의 내력과 의미를 파악하고 주성과정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여서 이번에 종명을 지은 찬자의 이름 등 다수의 판독오류를 발견하게 돼 다행이다”고 말했다. -신라 전미(全美)를 자랑하는 신종...현재의 콘크리트 종각이 아닌 옛 종각 형태 갖춰야 771년 혜공왕때 주성된 신종은 봉덕사에 매달았다. 달리 ‘봉덕사종’이라 부르는 이유다. 신라 이후 고려를 거치면서 폐허로 변한 봉덕사에 신종을 방치 할 수 없어 1460년 (세조 6년)영묘사에 새로 종각을 지어 옮긴다. 조선초 편찬된 ‘고려사’에서는 종소리가 백 리 밖 까지 들렸다고 기록한다. 이후 다시 1507년(중종2) 경주 남문 밖 봉황대 아래로 옮겼다. 군사 징집 이외에 성문의 개폐시 타종하기 위해서였다. 신라때 신성시 되었고 제례의식에 사용됐던 신종이 군사용이나 성문의 개폐시 사용됐다는 것은 종의 운명으로 보면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종각을 잘 지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1915년 다시 읍성 내아 자리에 있던 경주고적보존회로 옮긴다. 지금의 경주문화원 경내 종각이 그곳이다. 이후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 콘크리트 종각을 건립해 신종을 옮겨 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서는 성문옆에서 신종을 치지도 않았다. 하물며 종이 울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조에는 새로 종각을 지을때마다 상량문을 지어서 남겨두었던 것은 높이 평가할 일이다. 그러나 현재 박물관의 종각을 지은 이들을 보면 ‘종각의 환경을 무시한 채 견고하게만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종각이 지어져야 한다. 그리고 천장은 목조, 아래는 흙이어야 신종 소리가 청량하게 울릴 것이다. 신라 전미(全美)를 자랑하는 신종을 이렇게 방치할 순 없다. 옛 종각은 전혀 고려치 않고 지금의 상태로 놔둔다는 것은 종에 이상이 있도록 기다리는 것과 같다. 원음(圓音)이 끝내 원음(怨音)으로 울고 말 것이다”고 강조했다. 소당 선생은 최근의 신라대종제작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다만 “고대의 이름없는 석공들이 손을 부르트며 오로지 작품에만 전념해 신종을 주성했다. 신라대종도 또 다른 예술의 절정체로서 문화재로 후대에 남을 수 있도록 혼을 다해 공을 들여야 한다”고 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