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부 김정설(金鼎卨 ,1897∼1966). 미당 서정주는 범부(凡父)를 가리켜 ‘천재 중의 천재’라고 했다. 김범부 선생은 경주가 낳은 대문호 김동리 선생의 친형으로 우리에겐 더욱 친숙하다. ‘신라 정신 풍류도의 화신’, ‘생전에도 사후에도 전설적인 인물’, 또 선생이 ‘최제우 론’에서 피력했듯이 동학에 관해 누구보다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이, 좌우익 사상기에 비교적 독자적인 길을 걸었으며 국학, 동양학, 풍류도, 동방 등의 연구 방법론을 정립하는 등 그야말로 발군의 능력을 선보였던 가장 탁월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천재성과 박학다식한 학문능력에 비해 산발적이고 미약하게 알려져 왔다. 본고는 ‘풍류 정신의 사람 김범부의 삶을 찾아서’김정근 교수(범부의 장녀인 옥영의 장남으로 외손자이며, 경주 출생으로 현재 부산대 문헌정보학과 명예교수)의 저서에서 발췌, 인용하고 동리목월문학관 장윤익 관장의 자문과 도서 협조를 바탕으로 구성했다. 특히, 범부 생애 연보와 주요 사상, 막내동생이었던 동리에 미친 영향, 최근의 범부 연구 동향 등을 다루었지만 매우 소략했음을 밝힌다. 또한 본고 전개에서는 범부 선생을 비롯해 이하 존칭을 생략했다. -범부선생 연보(이하 기사는 ‘풍류 정신의 사람 김범부의 삶을 찾아서’ 김정근 교수의 저서에서 발췌, 인용) 범부는 1897년 경주부 북부리 출생으로 김종직의 15대 손이다. 4세때부터 13세까지 고향 경주의 고명한 선비 김계사 문하에서 한문칠서 등을 공부했다. 이것이 그의 학력이라면 전부였다. 1911년 15세에 경주 김씨 옥분과 결혼했다. 19세(1915년)에 백산상회의 장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한다. 25세(1921년)에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에서 강의한다. 38세(1934년)에 경남 사천의 다솔사에 머물기 시작하고 이때 일본 교수단 40여 명을 대상으로 청담파의 현리사상 강의를 1주일간 진행해 감탄을 자아냈다. 45세(1941년)에 다솔사에서 해인사 사건으로 일제에 피검돼 옥고를 치른다. 49세(1945년)에 광복을 맞이하고 52세(1948년)에 서울에서 경세학회를 조직, 건국이념을 연구하는 한편, 일련의 강좌를 열었다. 그해, 첫 저술이 될 ‘화랑외사’를 구술했다. 54세(1950년)에 동래군에서 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다. 58세(1954년)에 ‘화랑외사’가 출판된다. 한국전쟁 직후 교동 최 준 선생에 의해 계림대학이 설립되고 59세(1955년)에 경주계림대학장에 취임한다. 62세(1958년)에 건국대학교에서 정치 철학 강좌를 담당했다. 동대학 부설 동방사상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한다. 66세(1962년)에 부산 동래에 칩거하며 부산대학교에서 정치철학 강좌를 연다. 67세(1963년)에 5.16군사혁명 세력의 외곽단체인 오월동지회의 부회장으로 취임한다. 이 단체 회장은 박정희 최고회의 회장이었다. 70세(1966년)에 간암으로 서울에서 타계한다. 1967년 범부 사후 1년부터 여러 논문과 학술대회가 꾸준하게 개최됐고 범부 사상 전반에 대한 연구가 이뤄진다. 특히, 그의 사후 43년인 지난 2009년 영남대학교에서 제2회 범부연구회 학술세미나가 열렸고 이 세미나는 범부 연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다. 모두 14편의 논문이 발표 된 것. 그 해 제4회 동리목월문학제의 일환으로 범부 사상을 재조명하는 ‘김범부 선생과 경주 문학’이라는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이 진행됐다. 범부는 일생동안 책을 읽고 사색했으며 그 결과치를 바탕으로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강좌를 베풀었다. 그러나 많은 저술을 구상은 했지만 막상 책을 여러 권 내놓지는 못했다. 생전에 겨우 ‘화랑외사’ 한 권을, 타계 후 후학들의 손에 의해 ‘범부 유고’, ‘풍류 정신’, ‘범부 김정설 단편선’ 등 세 권이 출간됐을 뿐이다. 범부는 ‘동방’을 기치로 내걸고 ‘나’ , ‘ 우리’를 찾고 지켜 그것을 기반으로 세계와 대결하려고 했다. 우리 민족의 장래도 그 길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것의 중심에 나와 우리를 위치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봤다. -동리의 맏형 범부...동리는 사상적인 면에서 범부의 충실한 계승자 범부는 3남 2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막내로 남동생 동리가 있었다. 나이차는 16살. 범부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따른 이가 동리(1913~1995)였다. 동리는 어릴때부터 범부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언제나 무엇이든지 의지하며 마음놓고 묻고 배웠다. 동리가 경신중학교에 다니던 17세에 ‘은하’라는 시를 보이게 되고 “철학보다 문학 쪽이데이”라는 한 마디는 동리에게는 해방의 메시지였다.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었다. 그는 그 길로 학교를 그만두고 오직 한 길 문학에만 집중하게 된다. 범부가 독립운동에 연루돼 자주 고초를 겪자 동리는 마음뿐 아니라 신체적인 고통도 함께 경험할 정도였다. 이는 범부에 대한 사랑과 존경과 애착의 적나라한 증표였을 것이다. 범부의 아픔은 곧 동리의 아픔이었다. 동리는 사상적인 면에서 범부의 충실한 계승자였던 것이다. 동리는 생전에 범부에 대한 언급을 여러번 했다. ‘백씨를 말함’ ‘백씨 범부 선생 이야기’처럼 별도의 지면에 글을 남기기도. 동리와 범부의 관계는 보통의 동기간을 넘어서는 것으로 동리에게 범부는 형님이자 큰 스승이었다. 일생동안 범부와 동리는 상생의 길을 걸었다. -‘화랑의 후예’, ‘만자동경’, ‘무녀도’, ‘을화’ 등에서 범부의 현묘지도의 멋 찾으려 하다 동리목월문학관 장윤익 관장은 “ 동리 선생도 한국의 저명한 세계적인 작가이지만 동리 선생 사상의 바탕은 친형님이신 범부 선생의 영향이다. 이를 배우고 이어받은 것으로 동리 선생 본인도 자주 언급한 바 있다. 신라정신과 풍류사상 등 동리의 세계관과 문학관 확립에 막대한 영향을 준 것이다. 동리의 문학은 범부 사상과 연계된 것이 많다. 범부의 가장 핵심 중요 사상인 화랑정신과 풍류사상은 우리의 고유 신앙으로부터 시작해 단군의 홍익인간, 신라의 화백제도로 이어진 것인데 이를 사상적으로 찾고 확립한 이가 최제우 선생의 동학이라면 동학과는 다르지만 그 바탕은 범부의 사상과 연계된다. ‘인내천’은 맥락을 같이 하지만 네오 휴머니즘(신인간주의)을 바탕으로, 특히 신라의 화랑정신을 찾아서 ‘화랑외사’를 지어 사상적인 확립을 한 이가 범부다. 이는 동리가 ‘화랑의 후예’라는 소설을 통해 새로운 화랑의 세계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만자동경’, ‘달’, ‘무녀도’, ‘을화’ 등은 범부의 현묘지도의 멋을 찾으려고 한 작품들이다. 동리의 소설을 통해 알려진 동학과 동방사상은 오늘을 사는 우리를 비추는 좋은 거울이다”고 했다. “범부는 만해 한용운과도 친했다. 하루는 만해, 범부, 다솔사 주지가 있는 자리에서 소신공양에 대한 이야기를 동리가 먼발치에서 듣고 이를 모티브로 등신불을 쓰게 됐다”고 동리의 ‘등신불’이 창작된 배경의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범부에게 풍류 정신과 동학은 뿌리는 같지만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 정신의 열매 시인이자 인문학자인 김지하는 “ 범부는 풍류도를 현대화 시켜보려고 애를 썼던 사람이다. 건국 초기에 국민윤리 같은 걸 보면 화랑도, 풍류도에서 국민윤리의 기본을 파악하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고대 풍류도의 부활, 샤머니즘에 대한 재평가, 신선도에 대한 재평가 등을 한 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이후 제3의 휴머니즘으로 기존의 접근과 다르게 양자의 장점을 키우고 ‘한국학’을 추구하려 했다. 제3의 휴머니즘에 입각한 신인간주의 운동을 제안한 바 있다. 또 범부는 우리의 상고사가 수운 최제우에 의해 동학으로 드러났다고 봤다”고 했다. 범부는 자신이 최고의 가치를 부여했던 풍류 정신을 민족 도덕의 원리로서 대한민국의 국민윤리 수립을 위한 전략 품목으로 당대에 제시했다. 그는 풍류 정신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최제우의 동학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하기에 이르렀다고 결론을 내린다. 범부에게 풍류 정신과 동학은 뿌리는 같지만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정신의 열매였던 것이다. -“여러 학자들의 공력으로 범부가 역사속에서 부활하는 것은 감격적” 범부의 삶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외래 사상에 노출되기는 했으나 그것에 의해 흔들리거나 혼란을 일으킨 적이 없는 순전한 토종 사상가의 그것이었다. 특히 서양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민족의 과거 경험에서 지혜를 구하고자 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풍류 정신의 천명과 동학에 대한 깊은 이해로 나타났다. 그는 언제나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활기차고 당당하고 낙관적이었다. 일생동안 주변에 사상의 꽃씨를 뿌리는 삶을 살았다. 범부가 타계한 것이 1966년이니 대중이 그를 기억하는 일은 이제 매우 드문 것 같다. 그러던 즈음 최근들어 범부는 다시 학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사상가로서의 독창적인 기여때문에 재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범부 연구 활동을 특히 활발히 하고 있는 영남대학교 철학과 최재목 교수는 제2회 범부 연구 세미나에서 범부를 “ 김동리의 맏형으로 근현대기 한국의 사상과 학술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인 사상가다. 흔히, ‘하늘 밑에서 제일로 밝던 머리’로 평가된다. 그는 풍류 및 동방 등의 주요 개념들, 미당 서정주가 ‘신라의 대제주’라 표현했듯, ‘신라-경주- 화랑’ 개념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선각자라 할 만하다”고 했다. 최근 범부 연구 열기는 여러번의 규모있는 학술 모임이 있었던 바, 그때마다 범부의 삶과 사상을 조명하는 다수의 논문이 발표됐다. 영남대학교 학자들 중심으로 움직이는 범부 연구회 (‘범부연구회’는 일제 강점기 잊혀진 사상가 중 범부 김정설을 새롭게 찾아내 그의 사상을 연구하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자 노력하는 순수학술 모임)가 주관한 세미나가 두 차례, 동리목월문학관이 주관한 범부 심포지엄이 역시 두 차례 개최된 바 있다. 내년 2016년이면 범부 50주기가 된다. 여러 학자들의 공력으로 범부가 역사속에서 부활하는 것은 감격적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