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밑자락 인왕동 양지마을에 있는 故 고청 윤경렬 선생 고택을 찾았다. 고청 선생의 자제인 윤광주 선생(71)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삭풍에도 볕이 따스한, 그래서 햇빛 마을로 불리는 자택은 향후 전문적인 수리와 기념관 건립이 추진될 예정으로 있다. ‘마지막 신라인’ 고청 선생의 숨결이 살아있는 고택의 사랑채에는 고청 선생의 생전 사진, 자화상을 비롯한 유화작품과 토용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1972년 지어진 자택은 시간성에 비해 고색이 짙었다. 미물같은 5월의 한가로운 바람이 사랑채를 휘감고 처마 끝 풍경 소리가 그윽했다. 부인이 직접 내린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은 달디 달았다. 윤광주 선생의 느릿한 말씨에는 진정성이, 낮은 톤의 음성에는 진중함이 배어 나왔다. 선생은 조용히 부친인 고청 윤경렬 선생에 대해, 자신에 대해 읊조렸다. -부친인 고청 선생의 평생노력을 헛되지 않게 하려는 작업과 함께 수많은 문화재 복원, 복제 작업에 매진 ‘평생 신라의 수문장이 되어 서라벌의 맥을 잇고자 노력했고 죽어서는 남산의 수호신이 되리라’던 고청 윤경렬 선생의 흔적은 선생이 제작했던 작은 토우에서부터 남산 골짜기의 고졸한 석탑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우리 곁에서 선연하다. 1952년 어린이박물관학교를 국내 최초로 탄생시킨 선생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우리문화를 알리고 찾고 지키고 있는 우리 문화의 길잡이로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는 것. 영원한 신라인이자 문화인이었던 선생의 열정과 뜻은 고스란히 아들 윤광주 선생에게 이어졌다. 유물과 유적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수많은 문화재 복원과 복제 작업을 해 온 것이 그것이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자부심을 가진 것은 물론 다른 마음을 품은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며 고청 선생의 평생의 노력을 헛되지 않게 하려는 작업과 함께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영역으로의 작업의 확대 발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선친을 선생님처럼 생각했습니다. 여느 부자지간의 자상한 풍경은 없었던 것 같아요” 윤광주 선생은 개성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인왕동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살았다. 1967년 당시 신라의 전설이 담긴 기념그림엽서를 제작했는데 인쇄소에서 불이 나 창고에 쌓여있던 그림엽서가 다 타버린 일도 있었다고 했다. “당시는 신라 콘텐츠의 귀중함을 잘 모르던 시절이었으니 매우 주요한 사업이었지요” 이 일로 빚을 지게 되었고 군 제대 후 교동으로 이사를 한다. “제대 후 건축 의장일을 하게 됐습니다. 지금의 건축 디자인인 셈이지요. 부산의 코모도 호텔을 비롯해 몇 개의 공사를 했는데 잘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지요. 점차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기 시작했고 부모님께 집을 지어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지금의 인왕동 양지마을 이 동네에 초가집 두 채를 샀습니다”고 했다. “인왕동에 살던 시절, 선친의 후학들이 우리집에서 사숙을 했는데 한 식구처럼 살았습니다. 삼선당 금관 제작 보유자 김인태씨, 종의 원형을 만들고 있는 오해익 조각가 등과도 형제처럼 지냈고요. 식구가 많을때는 10명이 넘을때도 있었죠. 그때 선친은 토용 기법을 가르쳤고 박물관 학교도 만드셨지요. 나도 어린이 박물관 학교 1기입니다. 문학공부도 병행했는데 당시 축음기와 그때 만든 문집도 남아 있습니다. 또 당시로서는 상당히 첨단적인 미술 작업도 시도했고요” “집에 오가던 선각자로는 이응로 선생, 동양의 카루소로 불리던 테너 권태오 선생, 가톨릭의 선각자 김익진 선생, 석우일 신라역사과학관 관장, 서양화 1세대 손일봉 선생, 신라대전 대통령상에 빛나는 조필제 선생 등으로 뜻이 있는 곳에 인맥이 모여진다는 것을 알았죠. 그들과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선진적 교육을 펼치셨지요”라고 회고했다. “지금도 돌이켜보면 당시의 미술수업과 파리 유학파들의 특강 등은 내게도 매우 큰 영향을 주었고 자양분이 됐습니다” 며 “우리가 지금까지 성장하면서 고민하고 생각한 바탕에는 선친과 선친주위에 모였던 분들의 진솔했던 교육과 선각적인 문화적 안목이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고청은 사숙하던 다른 자제들과 함께 아들이 성장했으므로 특별히 챙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도 덩달아서 선친을 선생님처럼 생각했습니다. 여느 부자지간의 자상한 풍경은 없었던 것 같아요. 거리를 두려고 매우 노력하신 것 같습니다. 늘 옳은 말씀으로 지도하시고 실수도 없으셔서 더욱 그랬지요. 어머니는 남달랐지만요...,” -경주읍성 재현 등 문화재 복원 및 복제 사업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워 윤광주 선생은 젊은 시절, 가구 디자인 작업과 테라코타 작업 등 건축사업을 통해 복원 복제 쪽으로 전향해 매진해 왔다. 경주읍성 재현, 성덕대왕신종 제작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그는 국립중앙박물관 금동용두당간, 경주국립박물관 성덕대왕신종 전면문양 복제 작업, 문화재 관리국 신기전지 화차 제작, 국립경주 박물관 경주 남산모형 제작, LA올림픽 한국관 석굴암 부조 및 석기 유물 제작, 용산전쟁기념관 역사관의 화포를 재현한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의 복원 등 전국적 문화재 복원 및 복제 사업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경주사람 이장손이 만든 비격진천뢰도 복원했다. 중국 집안현을 현지 답사 후 광개토대왕비를 일대 일로 7기를 제작하는가 하면, 소설가 최인호와 작업한 ‘잃어버린 왕국’ 다큐 영상 작업을 같이 하기도 했다. -선친이 남기고 간 가장 큰 유산인 ‘경주의 혼과 신라의 숨결 이어가는’ 사업할 것 고청 선생의 재산권은 지난해 봄, 문화재청의 문화유산국민신탁에 이월된 상태라고 한다. 살림은 고청기념사업회(회장 김윤근)에서 하고 운영이나 결정, 재산권은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하기로 했다고. 어린이 문화교육의 선구자로서의 재산권이 문화재청 주도로 가게 된 것에 대해 “내 대를 지나면서 고청에 대한 의식이 점점 엷어질 수 있는데, 고청 기념관은 대가 바뀌어도 영원히 남는 것이므로 미련 없습니다.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고 전했다. 오는 6월,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고청 기념관의 구체적인 사업의 진행을 위해 착수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고청 기념관 건립 기본계획으로는 어린이 박물관 산실인 고청 고택에 대해 역사적 가치와 이해를 하고 기념한다는 것이다. 남산 지구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던 역사문화교육을 전승하고 경주 문화를 이해하는 사랑방 교실을 운영할 계획이다. 이로써 경주 문화를 이끌어갈 미래 인재를 양성하고 고청의 강의 내용을 보강한 자료집을 발간하고 신라시대 전통 토제 인형(토용, 토우)제작 방법을 전수하고자 한다. 고청 선생이 남기고 간 가장 큰 유산인 경주의 혼과 신라의 숨결을 이어가자는 것. “갤러리, 문화사랑방 교실, 공방 등의 공간을 통해 고즈넉한 정취를 느끼며 선생의 저서 및 발간물을 통해 문화적 사고를 교류하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기능하고 어린이 박물관학교의 산실이자 남산 연구의 발원지로 가꾸려고 합니다. 갤러리를 통해서는 선친과 관계를 가졌던 제자들의 작품, 선친의 원고 및 집필하신 책 등을 전시 할 계획입니다. 선친의 남산에 대한 이야기를 영상실로 만들고 책 자료실은 물론 작더라도 아트 샵 형태도 갖춰 운영해야죠” -신라왕경복원에 경주의 인재가 참여하고 종사하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저는 일단 토용 작업을 할 수 있을때까지 계속할 것입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왕경 복원이 수년내에 끝나는 작업이 아니잖습니까. 그러자면 우리 지역의 인재를 키워야하는데 대학 과정이면 더욱 좋겠지만 훈련원 형태의 교육기관이라도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문화재청 시험과정을 거쳐 자격증을 부여하고 충분한 교육을 통해 문화재 복원에 참여시키는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경주의 인재가 참여하고 종사하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이 씨앗이 발아돼 경주에 이바지 하는 인재가 늘어날테니까요” 했다. 성덕대왕신종을 모델로 한 최근의 ‘신라대종’제작에 관해서도 “장식은 조형적인 것으로 소리를 더 아름답게 장식하는 하나의 꾸밈인 것입니다. 형태도 중요하지만 소리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고 제언했다. 경주 토박이로서 부친인 고청 선생의 업적을 고청기념관으로 이어가는 그의 행보는 점진적이었지만 소박했다. 조상의 신기를 공감하도록 하는 그만의 작업도 계속될 것이다. 그는 현재 투병중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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