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경전에서 부처만이 살 수 있는, 소위 정토(淨土)에 대한 묘사는 다양하다. 가령 금모래가 깔려 있는 연못, 그 속에는 여덟 가지 공덕이 있는 물로 채워져 있고, 거기엔 수레바퀴만한 연꽃이 피어 있다. 언제나 천상의 음악이 연주되고, 대지는 황금색으로 빛나며, 밤낮으로 천상의 만다라 꽃비가 내리며, 아름답고 기묘한 빛깔의 백학·공작·앵무새가 맑은 소리로 평화롭게 지저귀는 그런 곳이다. 우리 인간이 늘 꿈꾸어오던 황홀한 이상의 모습 말이다. 한편,《법화경》에서는 수많은 보살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사바세계)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솟아올라 석가여래에 예배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가 기어이 가 닿아야 하는 이상향인 정토를 우리 땅에다가 시설한 점이 특이하다. 《삼국유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신라 35대 경덕왕이 (경주) 백률사로 놀러 갔다가, 산 밑에 다다랐을 무렵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났다고 한다. 땅을 파고 큰 돌을 캐내었더니 돌 사면에 사방불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다 절을 세우고 부처님의 땅에서 파냈다는 뜻으로 이름을 굴불사(掘佛寺)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보통 정토나 천국, 천당 같은 곳은 어디에 있다고 인식할까? 서양의 헤븐(heaven) 개념과는 다를지라도, 주로 하늘에 있으리라 생각한다. 땅에 붙어 살아온 우리네 인간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이상적인 공간을 더욱 이상적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사는 곳에서부터 되도록 멀리 두는 것이다. 정토나 천국이라면 무의식적으로 하늘을 쳐다본다거나, 지옥 하면 땅 속 깊은 어디엔가 있으리라 생각하는 식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보편적 인식과 다른 경우가 위에서 본 법화경이나 삼국유사다. 여기에서는 정토가 바로 우리 발밑에 있다고 그리고 있다. 경주에 살던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있어 경주란 바로 불국정토였다는 말이다. 경주 땅 속에서 염불소리가 났다거나 동서남북 사방에 부처가 모셔져 있다는 사방불 내지 사면불은 이곳 경주가 부처가 상주할 조건이 이미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우리가 사는 이곳이 정토라고? 더 헷갈리는 기록도 있다. 대승사라는 절의 창건신화에 관한 대목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587년 하늘에서 어떤 바위가 붉은 비단에 싸여 산꼭대기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바위에는 사방으로 부처님이 새겨져 있었는데, 왕이 소문을 듣고 달려가 부처님을 예배하고 바위 옆에 절을 세워 대승사라고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하늘에 있어야 할 정토가 바위를 매개로 하여 땅에서 이루어진 경우다. 이 사면석불은 신라의 왕도인 경주가 아닌 문경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지만, 지금도 대승사에서 윤필암으로 넘어가는 산 능선에 자리한 사면불은 하늘이라는 통상 정토에서 이곳 사바세계를 잇는 매개로 사면불을 위치시켜 결국 이곳이 정토임을 드러냈다는 점에서는 백률사와 흡사하다. 땅에서 솟아난 게 아니라 땅으로 떨어진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결국 무엇인가? 땅에서 솟든 하늘에서 떨어지든 최후의 종착역은 결국 경주 바로 이 땅이란 것이다. 우리 선조들에게 있어 정토는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여기였다는 사실이다. 솟구치든 내려앉든 이곳을 정토로 인식하고자 함에는 예외 없다. 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이 틀리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보다 지금 이 곳의 현존적(現存的) 경험치가 더 값지고 소중하다는 말일 테니까. 행정구역상 경주시 동천동 406(백률사)이 정토의 주소는 아니다. 정토가 물리적 공간이라기보다는 인식론적 영역을 상징한다면, 신라에 먼저 사셨던 당신들 눈에 보이는 나무 한그루 돌 하나하나가 다 불국정토요 유토피아며 극락이었다. 자, 지금 우리 눈에는 경주가 어떻게 보이는지 한번 되짚어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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