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예술학교. 경주예술학교는 해방 전 일본 유학파들이 대거 입국하면서 북쪽에는 해주에, 남쪽에는 경주에 자리하면서 혼란기 예술의 전통을 이어왔다.
미술과와 음악과의 졸업생들이 경주에서 예술활동을 해오면서 경주 예술인들의 밑거름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음악과는 성악·기악·작곡 전공으로 세분됐고 미술과는 중앙화단의 화가를 대거 강사로 기용해 당시 경주는 유명 화가들의 집결지였다.
이번호에서는 경주예술학교의 태동과 역할을 통해 우리나라 예술문화의 연원지로서의 경주를 밝히고자 한다. 이는 산술적 수치로서의 근원지만이 아닌 근대 경주의 미술과 음악의 신세계를 열었고 ‘모던’했던 선각자들의 집결지로서 경주를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해방후 경주에는 도시 규모에 비해 근대 작가군이 매우 다양하게 포진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간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했으며 거의 잊혀지고 있었던 차제다.
경주예술학원 제1회 졸업생인 조희수 화백은 아직 현존한다. 본고는 경주예총50년사 ‘경주예술학교’ 와 ‘경주예술협회의 발자취’에서 발췌하고 인용했으며 지역의 최용대 중견작가의 자료와 인터뷰, 경주미협 박선영 지부장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구성했다.
-해방 후 이의성을 중심으로 1946년 남한 최초의 본격적인 예술학교 ‘경주예술학원’ 설립
해방전인 1940년부터 일본 등지에서 대거 입국한 유학생들과 예술인들이 해방 이후 속속 귀향해 새로운 질서 모색에 동분서주 하고 있었다. 경주예술학교는 이들이 경주로 집결해 경주 문화 건설을 꿈꾸며 개교한 학교다.
이들은 미술과, 음악과, 그리고 일제 강점기 권번을 모태로 한 국악과 등 3개 학과를 개설하고 발족한 것. 미술로는 손일봉, 손동진, 김준식, 최기석, 백락종, 김동청, 박봉수, 김만술 등이었고 음악쪽에는 이의성이 활약했다.
이들은 1942년 향토미술전을 개최 하는 등 전국적으로 음악회와 미술전을 열기도 했다. 해방 후 이의성을 중심으로 ‘경주예술협회’, ‘경주문화협회’를 거쳐 드디어 ‘경주예술학원’이 창립된다. 이의성은 먼저 경주의 문화예술가들을 꾸려 여러 행사를 주관하며 경주예술협회 조직에 나섰다.
1946년 5월, 경주예술학원은 2년제로 이의성이 설립자인 사설 예술학교였다. 교장은 손일봉으로 미술과 27명, 음악과 16명으로 출발했다. 당시 경주예술학원 위치는 경주군 경주읍 사정리 1번지(구 경주역사, 현 서라벌문화회관)였다.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던 경주예술학원은 최영조가 학원 인수를 결심하면서 부친인 최찬해(만송)가 사재를 쾌척하면서 순조로워지는 듯했다.
이는 훗날 경주예술학교 개교와 만송교육재단 설립의 기틀이 된다. 경주예술학교는 설립 당시에는 경주예술학원의 이름으로 출범했으나 1948년 3월, 3년제로 학제개편되었고 경주예술학원은 ‘경주예술학교’로 개칭됐다. 이때부터 만송재단이 관여한듯하고 교장은 김준식이었다.
출범 당시 경주예술학원은 미술과와 음악과 등으로 구성됐으나 경주예술학교로 개칭된 이후부터는 음악과는 빠지기 시작한다. 48년 5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한다. 49년 7월, 경주예술학교 학생 모집 광고를 대대적으로 내고 당시 대구합동신문, 영남일보, 대구시보, 연합신문 등이 이 사실을 크게 보도하면서 만송의 사재 헌납과 예술학교 개교에 대해 크게 칭송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경주예술학교 설립자 이의성의 친동생 이칠성과 이호성 및 작곡 담당의 한중길과 일부 미술과 교수들이 월북함으로 인해 경주예술학교 재단의 운영권이 계림학숙으로 넘어갔다. 이념 논쟁 등으로 존속할 수 없었던 것.
개교 4년 뒤 52년 3월, 2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같은 해 경주예술학교 개교 5주년 기념전을 가진다. 1952년 경주예술학교가 계림학숙으로 넘어갔으므로 폐교가 된 셈이었다. 만송재단은 계림학숙을 거쳐 지금의 선덕여중고로 발전한다.
-음악과는 성악·기악·작곡 전공으로 세분, 미술과는 중앙화단 화가 대거 강사로 기용
경주예술학교 교수진은 서양화에 배운성, 주 경, 손일봉, 김준식, 한국화 김영기, 이응로, 조각 김만술, 조각에 윤효중, 공민 김상권, 미술사 한상진, 국어 이달문, 도학 최기석, 불어 권오영, 해부학 김정완, 법학 최영조(만송재단 이사장), 공예 이기원, 문화사 황호근, 시론 정기복, 서도 최현주, 영어 한억문 등이었다.
음악과의 교수는 이의성(바이올린)·한중길(바이올린)·천시권(비올라)·이호성(첼로)·한순각(성악)·권태호(성악)·고태국(성악)·박정양(피아노)·한중길(작곡)·유장령(트럼펫)이었다. 음악과는 성악·기악·작곡 전공으로 세분됐다. 학과목은 음악사(유장렬)·합창(이호성)·코르위붕겐과 콘코네(한순각)를 비롯해 시창과 청음·음악통론·화성학·음악미학, 그리고 전공 레슨으로 편성되었다.
1947년 5월 경주예술학원 창립1주년 기념음악회를 개최했을 때, 이호성 지휘·박정양 피아노 반주로 음악과 재학생들의 관현악단과 합창단의 공연 및 전공별 독주와 독창이 있었다. 1949년 3월 음악과의 제1회 졸업생은 피아노에 김진호·배윤조·안무근·이상돈·최명림·최종석, 성악에 김해학·오영학·이종용·채찬용, 바이올린에 손지익·이창호, 첼로에 황태연, 그밖에 최종환·남지익·오해주·오해진 등이었다.
-경주예술학교 졸업생 주축으로 ‘제2세대’가 형성됐다고 보면 타당할 것
1996년 발간된 ‘음악과 민족’ 제12호 경주예술학교에 관한 기록을 보면, ‘1948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었는데 음악과에서는 김진호, 배윤조 등이고 성악에서는 김해학, 오영학 등이며 바이올린에 손지익 등, 첼로에 황태연, 최종환 등이었다. 미술과 졸업생은 김인수, 박재호, 박기태, 조희수, 이수창 등이었다. 이들은 경주와 서울 등지에서 중진으로 활동 중이거나 사업을 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당시 예술학교 개교를 전후한 교수진과 학생들의 동향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자료로는 경주예술 10월호에 실린 지역의 중진 작가 최용대 선생의 ‘경주의 예술인’ 이라는 글에서다.
‘한국 서양화가의 출발점인 고희동으로부터 경주 출신 황술조가 1925년 고희동과 같은 동경미술 학교에 입학하면서 경주 서양화 역사의 서막이 오른다. 이 후 손일봉, 김준식, 손동진 등으로 이어지면서 경주 화단은 1세대에 해당하는 일본 유학파에 의해 시작된다. 그 후 경주예술가 협회를 결성하고 있었던 김만술, 김준식, 손일봉, 주 경, 최기석 등에 의해 1946년 남한 최초의 본격적인 예술학교가 설립된 것이다. 이들 경주예술학교 졸업생을 주축으로 한 제2세대가 형성됐다고 보면 타당할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좌익 논쟁, 한국전쟁으로 교수와 학생들의 사망과 월북, 재정 파탄까지 겹쳐 학교는 지리멸렬해져...,
경주예총50년사 ‘경주예술협회의 발자취’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선 막대한 학교 운영 자금을 부담할 마땅한 재단이 없어서 나 역시 집 한 채 돈은 날렸답니다. 다행히 나중에 철도용지관리과에 근무하던 구학술씨의 도움으로 구 철도 역사를 교사로 사용할 수 있었지요”
-김만술 선생-
“당시 경주는 좌우익의 정치 대립이 심했던 곳이었지요. 특히 예술학교 음악과에 관여했던 교수들 중에는 뒤에 월북한 좌익 계열의 예술인들이 몇 몇 있었답니다”-김준식 선생-
이는 특히, 끝내 정식 예술대학 인가를 받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 3년제 고등학교로 운영되다가 52년 2회 졸업생을 배출한 뒤 해체되고 만다. 경주예술학교는 출발 당시부터 4년제 대학으로 계획되었던 만큼 특히 미술과는 세분화된 교과목의 설치, 그리고 무엇보다 화려했던 교수진용은 손일봉, 김만술, 김준식, 주 경 등 미술대학으로서의 요건에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술과의 활기와는 달리 전체 분위기는 파탄의 길을 가고 있었다. 날로 거칠어지는 좌익 학생들의 난동과 한국전쟁으로 교수와 학생들의 사망과 월북, 설상가상으로 재정 파탄까지 겹쳐 학교는 점차 지리멸렬해진다. 당시 졸업생들의 회고를 보면, “인근 울산, 포항, 안동, 대구는 물론 서울 등에서 100여 명의 화가 지망생들이 거쳐 갔습니다” -박재호 선생-
“한국전쟁때 사망하거나 월북한 학생들 중에는 실력있는 친구들이 꽤 있었습니다”-조희수 선생-
“미술과 교수들은 학교를 지키려고 고생 많이 했지요. 결국 손일봉 선생은 좌익 학생들로부터 친일파로 몰려 50년 초 사퇴했지요” -박기태 선생-
이런 와중에서 끝까지 학교를 지킨 10여명의 학생이 51년 제 1회 졸업생으로 배출된다. 이후 2회 졸업생을 배출한 뒤 당국의 학교 폐쇄령이 내리자 일부 학생들은 홍익대로 편입학 했고 이후 예술학교에의 꿈을 버리지 못하던 향토 미술인들은 미술과를 계림학숙으로 흡수해 운영하다가 이내 해체하고 만다.
결국 이 학교는 해방후 좌우익 충돌로 정치적 희생물이 되고 말아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지만 오늘날 지방 미술의 활기가 현역 작가인 대학 교수들과 이들이 양성 배출한 젊은 작가들의 활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에 경주 미술인에게는 더욱 아쉬움으로 남고 있다.
-“지금이라도 이 작업 하지 않으면 영원히 잊혀질수도 있다는 사명감의 발로”
오랜 시간동안 경주예술학교의 자료를 수집하고 오류를 바로 잡고 있는 최용대 작가는 “저도 1회 졸업생이었던 조희수 화백의 제자다. 경주예술학교에 대한 정립 작업은 벌써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그 면면을 보더라도 서울대 미대 보다 설립이 빠른 학교였고 교수진들이나 학생들이 대단한 분들과 많은 교류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잊혀질수도 있다는 일종의 사명감 때문이다” 고 강조했다.
박선영 경주미협지부장은 “올해 경주미술협회 산하에 경주미술사연구회를 발족했다. 말로만 전해 들었던, 전국에서도 당시 선구자였던 선배들의 족적을 지역인들이 너무 모르고 있어 안타까웠다. 시대를 앞서간 예술문화계의 혁신적 업적이나 시도를 조명해보고 싶은 당위성의 발로다. 지역의 중진 선배들과 함께 자료를 수집해 아카이브화 할 것이다”면서 이 작업들은 경주미술사 편찬과 경주시립미술관 개관의 근간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경주미술협회와 경주미술사연구회(박선영, 054)743-4724) 경주신문사는 경주의 근현대 미술사의 자료 및 사진을 제보받고 있다. 관련 자료를 가지고 있는 시민들의 많은 제보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