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이다. 김종필(89) 전 국무총리가 아내의 영정을 앞에 두고 하염없이 우는 모습을 방송으로 보았다. 평생을 같이 해온 반쪽의 부재는 살아있는 다른 반쪽이 견디기 힘든 고통인가 보다. 아흔의 경험과 세월로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일찍이 죽음의 문제는 중요한 철학적 주제로 다루어져 왔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내놓은 죽음에 대한 온갖 정의들은 누구에게나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죽음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죽음에 대한 엄청난 관심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결코 고민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문제가 철학적 영역에서 어떠한 객관적인 정보나 힌트도 줄 수 없는 것은 ‘내 죽음’이 고민의 대상, 다시 말해 검증 가능한 경험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내가 나의 죽음을 객관화할 수 없다’는 근원적인 딜레마에 빠져 있다. 불행히도 나는 나의 죽음을 경험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
때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죽음은 경험한다. 하지만 이때도 망인의 죽음은 외적인 현상이고 그마저도 나와는 별개로 이루어진 간접적인 경험일 따름이다. 죽음을 둘러싸고 당사자와 관찰자로 나눠질 뿐, 당사자가 아닌 관찰인이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은 타인의 죽음은 분명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살아있는 나에게 남의 죽음은 아주 생경한 사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에피쿠로스(Epikuros, 341~271 B.C)가 말한 대로 우리는 ‘살아있거나 죽어있거나 그저 둘 중의 어느 한 상태’에 있다. 살아있는 동안은 아직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어있는 상태에서는 더 이상 우리의 의식이 살아서 활동할 수 없다.
결국 죽음에 대한 우리의 총체적 지향작용은 죽음과 더불어 단절되고 만다. 죽음 앞에 이성과 경험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면 종교적 입장은 어떨까. 불교는 죽음에 대한 접근법이 좀 다르다. 죽음이 인도하는 이러한 막다른 길목에서 불교는 죽음의 표피적이고 간접적인 현상 이면의 원리로 시선을 돌린다.
불교에서 보는 죽음이란 생래적으로 의도된 접근이 불가능한 현상에 불과하다. 이미 핀 꽃이 돌아오는 봄에 다시 피지 않는 것과 같다. 결과는 결과일 뿐이지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원리가 탈각된 현상만으로는 죽음 문제의 근본적인 해소가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망자를 천도하는 의식인 영산재(靈山齋)에서는 삶과 죽음을 이렇게 노래한다.
사생육도, [이것은] 진리를 미한 것인즉 (그곳을 떠나지 못함이) 개미가 쳇바퀴 돌듯함과 같고,
팔난삼도, [이것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것인즉 (그곳에 처함은) 누에가 고치에 자리한 것과 같다.
가슴 아픈 것은 생과 사가 그 언제인가부터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것인데,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하면 어찌 능히 면할 수 있겠는가?
불교에서는 우리네 죽고 사는 그 이분법 이면에 마음이 그 근원으로 놓여 있다고 했다. 달리 말해 마음이 죽고 사는 문제를 일으키는 주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죽는 것에 슬퍼할 게 아니라 사는 것에 안심할 게 아니다. 끊임없이 죽고 사는 것으로 이어지는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논리다.
너무 어렵고 심각하다면 이런 건 어떨까? 어느 일본 호스피스 전문의가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가장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를 뽑아놓은 게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더 자주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 더 친절을 베풀었다면, 살아있는 동안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려고 더 노력했었더라면, 죽도록 일만 하지 않았더라면… 등이란다.
등산으로 비유하자면, 정상만 쳐다보고 허겁지겁 올라가는 게 아니란다. 올라가면서 주변에 핀 꽃들도 봐가며, 함께 올라가는 친구들과 실실거려가며, 지금 이 순간에 더 집중하라 뭐 이런 말이겠다. ‘죽음’을 사는 게 아니라 ‘살아있음’을 살아가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