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삼릉방면으로 향하다가 보면 아름다운 돌담길이 나온다.
오릉 돌담길이다.
아름다운 돌담길이 끝나고 주차장으로 진입하는 입구 맞은편에 고풍스런 한옥이 한채 자리잡고 있다.
사정동 404번지.
이 한옥 한가운데 조선조때 월성김씨 3형제의 효행을 기린 비와 비각이 있다.
삼효자각이다.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조선조 병조판서 충암공 귀일의 손자였던 월성김씨 3형제인 응벽, 응규, 응정은 친상을 당하자 적막공산에 선친을 둔채 편안히 집에서 지낼수 없다며 묘옆에 움막을 짓고 3년간 꿇어앉아 정성을 다해 시묘했다.
묘에 예를 올릴때에는 항상 섬돌위에서 곡을 하였다. 그래서 3형제가 밟고 디딘돌은 뚫어져 깊이가 몇치나 되었다고도 한다.
어느날 저녁 비바람이 크게 부는 가운데 문득 소리가 들려 3형제가 귀를 모아 들으니 선친의 목소리였다.
깜짝놀라 움막 밖으로 나와 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뒤 또 소리가 나서 이상히 여겨 신주를 안고 움막 밖으로 나왔는데, 움막의 북쪽산 좌우가 무녀져 움막을 덮쳤다. 다행히 3형제는 무사히 피신을 했다.
3형제는 지극한 효행에 하늘이 돌본 것으로 여겼다. 도한 그들은 신춘(神春)이라는 개를 길렀는데 묘에서 집소식을 알고 싶으면 편지를 써 개의 목에 달아 집으로 왕복하면서 소식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개도 지극한 효행에 감동받은 탓이라고 동네 사람들은 여겼다.
3년이 지나 상복을 벗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조석으로 좋은 음식과 의복을 갈아 입지 않고 계속 조상의 사당 뵙기를 종신토록 하였으니 훗날 중종이 이 사실을 알고 이들의 효행을 표창하기 위해 왕명으로 3효자각을 건립했다고 한다.(동경잡지).
현재 3효자각은 월성김씨 연안문중 소유인 한옥 마당 한복판에 있는데 담장에 써있는 3효자각의 유래만이 쓸쓸히 적혀있다.
얼핏 밖에서 보아서는 효자각이 있는지 여부조차 분명치 않게 돼 있다.
이곳에서 살며 비각을 관리하는 강두복씨에 따르면 "1년에 몇 명씩은 관광객이 찾아 온다"고 한다.
탑정동 사무소 직원들은 비각의 존재여부조차 잘 모르고 있었다.
비지정문화재는 행정기관의 관심밖에 있었다.
사진 있음(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