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가 아름다운 나라,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삶을 영위하고 있음은 축복이다. 삭막한 겨울을 보내면서 다가올 봄을 당겨 읽는 즐거움, 장마와 무더위의 여름날에도 봄의 향기를 거쳐 온 포도알이 영글고 있으니, 생로병사가 하나임을 우리는 깨우치며 살아간다.
순리대로 걸어가는 길, 정직한 여정이란 이 땅의 자연을 받아들이고 닮아가는 삶이며, 그런 시간들을 유유히 끌고 온 정상화 전 대구문화방송 보도국장을 만났다. 정상화 국장은 대구 출향인 향우들의 대표 모임인 남석회 초대회장으로 10여 년 간 선후배간 화합의 문화를 만들어 존경받고 있으며 그 이미지가 매우 강하다. 이에 이하 호칭을 정상화 회장으로 쓰기로 한다.
문화가 무엇인지, 인간관계에 있어 신의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며 걸어온 정상화 회장의 길에는 여전히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손을 놓지 않고 있다. 대구 남석회의 중심에 정상화 회장이 있어서 회원 상호간의 삶에 상승효과를 가져왔고 25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도 회원 100여 명이 화합의 장을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남석회는 현재 형제처럼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임이 됐다.
정상화 회장은 1939년 경주시 성동동 68번지에서 태어났다. 당시 경주에서 정부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부친 정덕영 선생은 자식 교육에 있어 겸손을 최우선으로 심어주셨다.
정상화 회장은 계림초등학교, 경주중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서울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을 졸업하고 대구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정통파 언론인이다. 1967년 대구문화방송에 입사해 초임지 경주에서 정의를 앞세운 언론인의 삶을 시작한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1997년 보도국장으로 퇴임 시까지 정 회장은 대구, 경북 지역의 역동하는 역사 속에서 젊음을 불사른다.
그 중에서도 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 취재와 5대독자유괴사건 등은 잊히지 않는 사건들로 신념과 정의를 앞세웠던 혈기 때문에 곤란한 일을 당한 적도 수차례나 되었다고 한다.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고 물질보다는 명예를 중히 여겼다는 정회장을 지인들은 요즘도 가끔 일례를 들어 회상한다. 정상화 회장의 기억은 1960년 고려대학교 재학시절인 청년기에 잠시 머무른다.
구 근화여중고 자리에서 학교의 협조를 얻어 불우청소년을 위한 야학을 열었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고향을 가꾼다는 뜻의 ‘향경회’라는 명칭 아래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이 모여 실행한 이 일은 그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1965년에는 건천농촌지도소와 연계해 당시 서면 면사무소(현,건천읍사무소자리) 부속 건물에서 지역민들에게 한글과 음악 등을 가르치는 ‘건천지역사회개발학교’를 개설해 활동했다.
“물처럼 바람처럼 유유히 흘러 산다.”며 웃는 정상화 회장의 모습이 편안하다. 1997년 퇴임후 3년 간은 대구교통방송 개국요원으로 마지막 열정을 쏟았다는 정상회 회장. 1979년에 제 7회 자랑스러운 대구시민상을 수상했으며 국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사회봉사), 국민포장(국가사회발전유공자)을 받았다. 가족으로는 평양 출생인 부인 황윤옥씨, 개인사업을 하는 장남 연석씨, 중앙일보 미국지사에 재직 중인 차남 문석씨, 대학 교수인 삼남 연형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