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통과 통신 기술의 발달은 지구촌시대를 만들었고 특히 최첨단 통신기술의 발달은 모든 인류가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게 되었다. 종교 또한 과거의 폐쇄적인 틀에서 벗어나 다종교 시대에 살고 있다. 바이블벨트에 있는 휴스턴에도 이슬람 모스크가 있고 이슬람 나라 파키스탄에도 교회가 세워져 있다. 보스턴에도 캄보디아 불교가 있고, 모스크바에도 힌두교인, 런던에도 시크교인이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심지어 한가족 구성원간에도 종교를 달리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런 역사적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느 한 종교의 절대성을 주장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앞으로 어느 한 종교가 세상의 유일한 종교가 되어야 하며, 또 그렇게 되리라는 생각은 견지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현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종교를 대부분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상극 관계나 배타 관계로 안주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종교현상’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이런 다종교 사회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주는 공존의 원리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본다. 종교는 인간의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는 신념체계이기 때문에 자기가 믿는 종교가 외부로부터 침해를 받으면 그 반응이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이 다 종교 사회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주는 공존의 원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가 믿는 종교의 가르침만이 참 진리라고 확신한 나머지 남의 종교를 폄하하거나 멸시한다면 공존의 원리가 깨어지게 되고 걷잡을 수 없는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마련이다. 내가 믿고 있는 종교가 소중하면 남의 종교도 소중하다. 종교 간의 우열을 논한다든가, 내가 믿고 있는 종교만이 참 진리이고 다른 종교는 미신이란 주장은 갈등만 조장 할 뿐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종교인 가운데 자기와는 다른 신앙형태에 두려움과 위협을 느낀 나머지 높은 담을 쌓고 자신의 신앙에 안주해 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너무나 소극적이고 자신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신앙생활이란 끊임없이 자신을 변혁시키면서 역동적으로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에, 이미 움켜쥘 무엇이 있어서 빼앗길 것이 두려운 상태로는 신앙의 에너지가 충전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와는 다른 삶의 모습, 다른 삶의 방식을 우선 ‘다르다’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그 다른 존재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서로의 마음을 여는 첫 단계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종교 사이의 이해와 협력을 증진시키는 일에 동참하는 것은 세상을 더욱 평화스러운 곳, 아름다운 곳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기원전 250년 경 최초로 인도를 통일하고 자신은 불교 신자이면서 종교에 관용정책을 펼쳤던 아쇼카 대왕이 그의 비문에 남긴 글은 모든 종교인들이 깊이 아로 새겨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종교만을 존중하고 다른 종교를 비난하지 말라.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종교도 존중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종교를 성장시킬 수 있으며, 또한 다른 이의 종교에도 도움을 주는 것이다. 행동이 그와 같지 않으면 자신의 종교의 무덤을 파는 것이며, 또한 다른 이의 종교에 해를 미치는 것이다” 〈약력〉 자유문학으로 문단 데뷔(수필가) 경주교도소 敎誨師, 경주불교청년회 지도법사, 경주불교연합회 대표 역임 현 경주불교 현정회 회장, (사) 6ㆍ3동지회 경북지부 감사 《저서》불교의 체계적 정립, 최신 비교종교론, 불국토를 꿈꾸며(수필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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