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보문단지에 묵고 있는 지인을 만나기 위해 새벽에 보문호를 찾았다. 7시 조찬이었지만 한시간 일찍 도착했다. 경주가 고향이면서도 정작 보문호 산책은 한번도 해보지 못한 터라 내친 김에 호숫가 산책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계단 길을 따라 호수에 연접된 산책로로 나섰다. 아침을 여는 잔잔한 물너울. 벤치 옆에 서 있는 벚꽃나무 가지에 푸른 종소리가 내려앉는다. 잊어버린 것들에 대한 되살림 같기도 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눈뜸인지도 모른다.
경주는 보문호를 사랑한다. 예전에는 경주의 젖줄과도 같았다. 풍만한 가슴으로 물줄기를 내려 서라벌 들녘에 알곡을 영글게 했다. ’59년 9월 ‘사라호’ 태풍 때는 범람의 위기를 맞았지만 보문호를 사랑하는 시민의 염원으로 버티어냈다. 그 때 둑이 터졌다면 천년 역사가 묻혀버리고 말았을 것이 아닌가. ‘어디 천년 왕도가 그리 쉽사리 사라질라’고 하면서도 내심 시민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음에 틀림없다. 부랴부랴 보문호 위쪽에 홍수조절용 ‘덕동댐’이 막아지고, 보문호에 오리배가 기우뚱거리는 아름다운 물꽃으로 다시 피게 되었다.
물보라가 핀다. 호수의 잔잔한 물결이 마주보고 웃는다. 바람 따라 켜지는 은은한 울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어져 내려가는 시간의 맥박이 뛰는 소리이다. 어린시절 가슴 콩닥거리며 꿈꾸어왔던 것들이 나의 가슴 깊은 곳으로 출렁이며 다가온다.
토함산을 타고 내려온 맑은 물빛에는 아름다움만 비치는 것일까. 모두가 무지개 빛이다. 아침 햇살이 걸려있는 벚꽃나무의 행렬은 꿈길처럼 아름답다. 벚꽃은 천상의 나무가 아닐까? 봄에는 아기웃음처럼 흰 다발을 주렁주렁 달고, 바람이 불면 하늘에서 가려 뽑은 천사들의 흰 날개옷을 일제히 펼친다.
은방울이 되기도 하고, 우리들의 바람이 기대는 별빛이 되기도 한다. 햇볕이 뜨거울 때는 푸른 잎사귀들을 양산처럼 받들고 우리를 부른다. 벚꽃나무 밑을 거닐면 잊어버린 사랑이 되살아온다. 사계절 마다않고 미소를 자아올리는 아름다운 심성. 그 마음결이 보문호에 뿌려진 때문일까? 유난히 연인들의 발걸음이 경쾌해 보인다. 보문호 산책길에서 반가운 속삭임을 들었다.
“경주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어요”
“내년 봄에 벚꽃이 필 때 다시 한 번 옵시다”
많은 사람들이 경주를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는 데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21세기를 향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지식정보화시대에 맞춰 경주를 제대로 알리려면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이 필요할 것 같다. 이제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고분 등을 삽화로 넣은 단편적인 홍보물로는 다른 지역의 사람을 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천년의 문화유적 외에도 그 문화를 탄생시킬만한 자연적 배경을 현대인들의 사고의 관점에서 재조명해 보는 홍보 전략을 서둘러봄직하다.
천년 문화유산을 찾아가는 길 옆으로 이런 배경을 넣으면 어떨까? - 노부부나 연인들이 다정스레 걸어가는 보문호 산책길, 벚꽃비가 내리는 인도에서 아이들이 함빡 웃는 모습, 남산을 오르며 기도하는 여인의 고운 얼굴, 석굴암 부처님과 동해바다의 일출 등 -
보문호의 아침은 온통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달음박질 하는 사람,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 가족끼리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모습이 어우러져 아침의 호수를 눈부시게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거울처럼 비쳐주는 보문호여! 역사의 향기가 소나무향처럼 은은히 묻어나고, 가장 친인간적인 아름다운 공간이 사방에 늘려있는 내 사랑 경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