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립화장장 이전부지 서면 결정에 반발
아화에 취재를 갔던 날이 마침 경주시립화장장 이전부지가 서면으로 발표되고 이 지역 주민들이 경주시청 앞에서 대규모 반대집회를 가졌던 다음날이었다. 마을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주민들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주민의사를 무시하고 화장장 부지를 결정한 경주시의 처사를 비난하는 주민여론이 높았다.
아화(阿火)는 경주시 서면지역으로 영천시 북안면과 경계를 이루며 경주의 서쪽 관문에 해당하는 마을이다. 서면사무소와 아화초등학교, 아화중학교, 아화농협, 아화역 등이 이 마을에 있다.
아화는 넓은 벌판과 언덕을 끼고 있는 마을로 본래 ‘아불(阿弗)’, ‘아울(阿鬱)’, ‘아을’이라고 불러오다가 ‘불’을 ‘화(火)’로 표기하면서 ‘아화’가 된 것으로 보인다. 언덕에 불을 지르면 종일 불이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고 하여 ‘아화(阿火)’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훗날 글자를 풀이하여 지어낸 이야기로 추정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아화의 옛 이름은 아불(阿弗)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지』권 제30 동이전 진한조에는 아화(阿火)는 ‘우리 마을’이라는 뜻이 있다고 적고 있다.
아화는 현재 4개 리로 구획되어 있다. 아화역을 기준으로 역 앞 도로의 서편일대 ‘구역전’, ‘신시장’, ‘주막각단’, ‘타만리’가 아화1리, 철길너머에 ‘구장테’, ‘안장테’, ‘오룡골’, ‘관골’은 아화2리, 아화 서북쪽의 ‘빼골’, ‘시못골’이 아화3리, 아화역 앞 도로 동편 일대의 ‘삼거리’, ‘주막각단’, ‘역전’이 아화4리를 이루고 있다.
아화는 현재 720가구에서 1천581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아화1리는 344가구 750명, 아화2리는 148가구 311명, 아화3리는 80가구, 190명, 아화4리는 148가구, 330명이다.
아화는 면소재지이면서도 넓은 들을 끼고 있어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의 비중이 높다. 농업인의 경우 주로 벼농사를 짓고, 포도(8만제곱미터), 배(1만7제곱미터), 복숭아(7만7천여평), 고추, 마늘, 한우(400두) 등을 기르고 있다.
다만 중심상가를 이루고 있는 아화1, 4리의 경우 상업과 직장인이 많은 편이라 농업인구가 절반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화2,3리는 순수한 농업가구이다.
아화(1리~4리)에서 최고령자는 아화중학교 정문 앞에 살고 있는 하일주(여 101세) 할머니로 아직 출입할 정도로 건강하다.
다섯 마리 용이 날아가는 형상
구역전 약 80년전에 이곳에서 동쪽, 경주방향으로 약 100m 옮겨 지금의 자리에 역이 만들어졌다. (40가구)
신시장(新市場) 아화장이 있는 마을로 ‘장테’, ‘새장터’라고도 한다. (280가구)
주막각단 옛날에 주막이 있었다는 마을로 안장테 동쪽, 583번지 일대다. 농협사거리 서쪽으로 약 150m지점이다. (45가구)
타만리 마을 뒷산에 탑이 있었다고 하여 탑말, ‘텃마을’, ‘터말’, ‘타만리’, ‘탑만리(塔末里)’, ‘탑안리’, ‘탑말(塔末)’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이라 ‘양지마을’이라고도 한다. (45가구)
구장(舊場)테 옛날에 아화장이 있었던 곳으로 ‘장테’라고도 한다. 아화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아화의 본동에 해당하는 이 마을은 본래 인물이 많이 났는데 왜놈들의 신사가 들어서고 나서는 인물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서면을 떠나면 잘되는데 이곳에 사는 젊은이는 잘 안된다고 한다. 또 오룡골에 공동묘지가 들어서 젊은 사람이 자주 죽고 마을이 잘 안된다고도 한다. 그래서 20여년전에 마을 쪽으로 묘를 쓰지 못하게 경계를 지어 놓았더니 그 후로 젊은 사람이 죽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30가구)
동제 이 마을은 80년대 초까지도 정월보름에 동제를 지냈으나, 5~6년전부터 지내지 않고 있다.
당나무 마을 가운데 수백년 된 향나무가 있었는데 몇 년 전에 죽었다. 그런데 이 향나무 뿌리를 캔 사람의 백일 지난 아이가 간질병에 걸렸다고 한다.
안장테 구 장테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철길로 인해 마을이 나누어져 있다. (40가구)
오룡골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마치 다섯 마리의 용이 날아가는 형상이라 ‘오룡곡(五龍谷)’, ‘오릉골’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은 용이 못 난다고해서 무덤을 만들 때 둘레석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20가구)
동제 이 마을은 해마다 음력 정월대보름이면 동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관골 조선시대에 원집이 있었다는 마을로 ‘관곡(官谷)’이라고도 한다. 예전의 장터에 있는 마을이다. (5가구)
임진왜란 때 빼고 지나간 ‘빼골`
빼골 마을이 골짜기에 들어가 있어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 마을을 빼놓고 지나갔다고 하여 ‘빼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영천군과 경계를 정할 때, 북쪽 갈현(渴峴)을 경계로 해서 이 마을이 빠졌다고 하여 ‘빼골’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른 이야기는 골짜기가 길게 뻗었다고 하여 ‘빼골’ 또는 ‘추곡(抽谷)’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빼골은 다시 ‘웃빼골(상추)’, ‘아랫빼골(하추)’, ‘갈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화 서북쪽, 갈고개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웃빼골 빼골의 위쪽에 있는 마을로 ‘상추’라고도 한다. (30가구)
아릿빼골 빼골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하추’라고도 한다. (30가구)
당나무 이 마을은 수백년 된 느티나무를 당나무로 섬기고 있다.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시못골 옛날 이 마을이 목화와 마를 많이 재배하던 골짜기라 하여 ‘세목곡(細木谷)’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 옛날 어느 효자가 이곳에서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고 하여 ‘시묫골’, ‘시뭇골’, ‘시모골’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화의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10가구)
삼거리 이 마을에서 세 방향으로 길이 나 있다고 하여 ‘삼거리’ 혹은 ‘삼왕(三往)’이라 불렀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이 마을에는 항상 행운과 불운과 힘센 장사가 나는 세 가지의 기이한 일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여 마을이름을 ‘삼기(三奇)’라 하였다고도 있다. 아화 동남쪽 삼거리 옆에 있는 마을로 면사무소, 아화초등학교, 아화역 등이 이 마을에 있다. (130가구)
역전(驛前) 아화역 앞에 있는 마을이라 ‘역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7가구)
과거급제로 화짓대 세워
최못갓 최씨의 묘가 있는 말림갓으로 시못골 동쪽에 있다. 아화 서쪽이다.
화지산 옛날 노씨(盧氏) 성을 가진 이가 과거에 급제하여 화짓대(솟대)를 세웠다고 하는 산으로 제반짓골 위에 있다. ‘화짓대산’, ‘화짓대배기’라고도 한다. 지금 만불산 남쪽에 있다.
황모갓 아화와 빼골 사이에 있는 산으로 황씨 묘가 있는 황씨의 선산이다.
완산 평지에 독립적으로 솟은 산으로 아화 서쪽에 있다. 옛날에 이 곳에서 봉화불을 피웠다고 한다.
진등산 타만리 뒷산으로 등성이가 길어서 ‘진(긴)등산’이라고 한다.
갈고개 아화리와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갈현(渴峴)’이라고도 한다. 영천과 경주의 경계지점으로 옛날에 화장터이기도 했던 무서운 곳이라고 한다.
도독골고개 도독골의 위쪽에 있는 고개로 옛날에 도둑이 많이 나타났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은 무서워 밤에는 사람이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경주에서 영천으로 가다가 갈고개 너머 왼쪽에 있다.
서낭고개 아화에서 시못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예전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재 시못골에서 영천시 북안면 신촌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사부랑고개’라고도 한다.
연당고개 빼골 서쪽에서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의 연당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진등고개 타만리에서 영천시 북안면 신촌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진등 위에 있다.
한잿골재 아화에서 빼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한잿골 위에 있다.
도둑이 숨었던 도독골
너구리바웃등 너구리바우가 있는 등성이로 동자분등 남쪽에 있다. 아화 동북쪽의 활대등과 진등 사이에 있다.
동자분등 새밋등 북쪽에 있는 등성이다.
막등 시못골 동북쪽에 있는 등성이다.
목우장등(牧牛場嶝) 소를 기르던 목우장(목장)이 있던 등성이로 최못갓 서쪽에 있다.
새밋등 새로 쓴 하씨(河氏)의 묘가 있는 등성이로 타말리 뒤쪽 활대등 북쪽에 있다.
진등 타만리의 서북쪽에 있는 긴 등성이다.
푸심등 시못골의 북쪽에 있는 등성이다.
활대등 시못골 북쪽에 있는 활대처럼 생긴 긴 등성이다. 막등 북쪽에 있다.
도독골 옛날 도둑이 숨어 있었다고 하는 골짜기로 시못골 서쪽에 있다. ‘오잠골’, ‘오잠곡(五蠶谷)’이라고도 한다.
산짓골 시못골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너구리바웃등이 있는 곳이다.
소뭇골 시못골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소문골’, ‘효문동(孝門洞)’이라고도 한다. 하씨 문중산 남쪽으로 지금도 한 집이 있다.
예수골 옛날 여수(여우)가 살았다는 골짜기로 아화 서쪽에 있다.
용천골 빼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심곡리 영경원 터 밑이 된다. 용이 승천했고도 한다. 현재 만불사 경내가 된다.
제반짓골 시못골의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한잿골 예수골이 북쪽에 있는 골짜기다.
너구리바우 너구리굴이 있었다는 바위로 아화 북쪽에 있다.
관들 오룡골 동쪽에 있는 들로 옛날 이곳에 관청이 있었다고 한다.
새못밑 새못 밑에 있는 들이다.
수리바지 심곡저수지 아래에 있는 들로 수리못의 물을 받아 농사를 짓는다고 ‘수리바지’라고 부른다. ‘뚝뜰’이라고도 한다.
역답(驛畓) 옛날 아화역에 딸린 논으로 오룡골 남쪽에 있다. 지금은 이곳에 경부고속도로가 났다.
못 막은 후 어린아이 빠져 ‘애기못’
길못 오룡골에서 웃빼골로 가는 길에 있는 못으로 못둑을 길로 사용한다.
새못 아화 남쪽에 있는 새로 판 못 으로 ‘아화새못’이라고도 한다.
소뭇골못 소뭇골 앞에 있는 못으로 ‘효문동지(孝門洞池)’라고도 한다.
안애기못 애기못의 안쪽에 있는 못이다.
애기못 아화에서 제일 큰 못으로 시못골 앞에 있다. ‘아기못’, ‘여기제(女妓堤)’라고도 하는 이 못은 못을 막고 얼마 후 어린아이가 빠져죽었다고 한다.
오룡못 오룡골에 있는 못으로 ‘오룡골못’, ‘오룡지(五龍池)’라고도 한다.
옹당못 아화 서남쪽에 있는 못으로 동그랗게 생겼다.
타만리뒷못 타만리 마을 뒤에 있는 못이다.
준천보 신시장의 북쪽에 있는 보. 지금은 경지정리하면서 없어졌다.
아화역(阿火驛) 아화에 있는 중앙선 기차 정거장으로 지금은 역무를 보지 않는다.
아화보 아화파출소 뒤에 2년 전에 새로 만든 보다.
관터 오룡골 동쪽, 옛날 아화초등학교 부지와 밭이 되어 있는 관들 앞의 터로 옛날 관청이 있었던 곳이다.
아화역테 서쪽으로 영천의 청통역(淸通驛)과 서남쪽의 경산의 압량역(押粱驛)으로 통하던 관들에 있는 옛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에 딸린 아화역의 터이다. 아화 583번지로 통한다.
부체당 오룡골에 있는 당집으로 굴을 파서 부처를 모셨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아화장(阿火場) 구장테에 있다가 삼거리 북쪽으로 옮겨와 1일, 6일에 서는 서면의 장이다.
아화리 지석묘군(阿火里支石墓群) 아화에는 7기의 지석묘가 있는데 심원사 어귀의 길 왼쪽에 2기(基), 관터 동쪽 송림에 5기(基)의 지석묘가 산재해 있다.
시경계석 빼골의 경주시와 영천시의 경계지점에 세운 높이 2.2m의 표시석으로 ‘신라천년의 고도경주 어서오십시오’라고 새겼다. 이 비석은 2005년에 서면 향토회에서 세웠다.
소방도로 개설과 택지 조성
서면은 소방도로 개설이 가장 시급하다고 한다. 583번지 일대 주거지역에 소방도로가 없어 주민들의 어려움이 많다. 주민들은 파출소 남쪽으로도 소방도로가 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면은 한 때 인구가 1만2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지금은 3천600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인구를 유입하려고 해도 건물을 지을 땅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아화중학교 앞 들판을 논공단지나 주거지역으로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서면이 활성화되고 인구 유입이 이루어 졌으면 한다.
또 서면은 목욕탕이 없어 주민들이 목욕을 하기위해서 건천, 경주로 가야하기 때문에 불편하다고 한다. 목욕탕 건립이 되었으면 한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최주환(70 전 경주시 산림조합장), 김양호(65 전 신일대 교수), 김성오(63 전 경주시의원), 김정식(59 예비역 육군소령), 박춘발(52 전 경주시의원), 이상식(47 구미 산부인과 의사), 조준형(41 치과의사), 조진형(38 치과의사) 등이 있다.
마을취재에 협조해주신 김덕섭 아화1리 이장님께 감사드린다.
김거름삶
사진 최병구 기자/ 정리 이채근 기자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