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재 건(화가)
흔히 박수근을 한국의 밀레(J.F.Millet/1814~1875)라고 말하곤 한다.
밀레가 그의 명작인 ‘만종’, ‘이삭 줍는 사람들’을 그릴 당시 프랑스는 궁핍했고 농민들은 배가 고팠다. 들녘은 거칠고 매말랐으며 사람들의 동작은 힘에 겨워 무겁고 느렸다. 인내의 고통이 비장하게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시대에 대한 밀레의 휴머니즘이 발휘된 그림이 ‘만종’이다.
박수근이 활약하던 1950~60년대에 우리나라는 가난하였으며 화가가 그림을 그리며 생활한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수근은 고난속에서 평화와 소망에 대한 믿음으로 그의 그림속에서 희망을 만들어내며 위안을 찾았던 것이다.
밀레에 대한 화가들의 동경은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열렬했다. 고흐는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을 모사하면서 자연에 대한 경건성과 신앙에 깊이 젖으며 숭고한 예술세계로 들어갔다.
박수근 역시 12살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화가가 되기를 결심하면서 “하나님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평범한 견해를 갖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며 다채롭지 않다”라고 스스로 자기의 미학을 정립시켜 주었다.
박수근은 6.25 동란 후 미군부대에서 군인들을 상대로 초상화 그리는 것으로 생활을 꾸려나갔다. 이때 미군부대를 드나드는 미국인 여기자가 초상화가 아닌 그의 작품을 보고 참으로 한국적인 그림임을 알아보고 수점씩 구입해 가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그후로 주로 외국인에게 그림이 팔려 다수의 그림이 미국에서 역수입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시기에도 그는 늘 가난했고 그림값은 빈약했으며 그림값의 일부를 물감으로 보내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오늘날 미술계에서는 박수근의 그림을 유화물감으로 그린 한국화라고들 말한다.
그만큼 그는 우리의 삶속에 깊이 들어와 서민의 소박하고 진실된 인간애를 그려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