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리(東山里)
거랑과 늪에 덮을 막아 ‘덮마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통폐합 때‘동산리’
가을이 더욱 기품 있고 아름다운 것은 단풍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풍으로는 그야말로 이름 자체가 단풍나무라고 불리는 붉은 단풍나무를 단연 최고로 꼽지만, 노란 은행나무, 붉은 감나무 등도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마치 갖가지 물감을 은은하게 풀어놓은 것 같은 고상한 색상과 늠름한 자태를 자랑하는 느티나무의 기품 있는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한다. 지금 보문관광단지 도로변에는 느티나무들의 가을향연이 조용한 가운데 장엄하게 펼쳐지고 있다.
동산은 경주시 천북면사무소가 위치한 면소재지이다. 본래 이 마을은 동대봉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큰 거랑과 늪을 이루었던 지역으로, 등성이와 중마을 등지에 터를 잡고 살았으나 덮(물막이를 위해 나무와 흙으로 만든 제방)을 막아 물길을 돌리고 따뜻한 이곳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덮을 중심으로 그 위쪽을 ‘덮머리’, 그 아래쪽을 ‘덮밑’이라고 했다고 한다. 훗날 그 상류인 소리못과의 경계지점에 돌방천을 쌓아 물길을 바꾸고 난 후부터는 지금처럼 큰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마을 앞쪽 중간지점에 위치한 ‘중마을’과 그 아래쪽에 새로 생긴 마을인 ‘새터’가 옹기종기 한 마을을 이루고 살아왔다고 한다. 이 마을이 ‘동산’이라고 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 ․ 폐합으로 이 마을들을 통합해‘동산리’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동산으로 불리게 된 연유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다. 일부에서 동산(동대봉산) 아래에 마을이 있어, 동산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동대봉산과 이 마을은 거리가 있고, 그 사이에 ‘소리못’이나 ‘갈곡마을’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산1,2리 동제도 같이 지내는 한마을
현재 이 마을은 동산1리와 동산2리로 구분되어 있지만, 밖에서 보기에도 경계가 없는 사실상 한 마을을 이루고 있고, 실제로 동제나 크고 작은 마을 일들을 모두 같이 하고 있어 정서적으로도 한 마을이다. 다만 행정구역은 ‘덮머리’, ‘덮밑’, ‘중마을’이 동산1리, ‘새터’가 동산2리로 나누어져 있다.
정확한 경계는 이장님이나 알 정도이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그 경계조차 잘 모른다. 대략 천북면사무소 아래에서 화산쪽으로 가는 새로 난 샛길을 중심으로 그 동쪽은 동산1리, 서쪽은 동산2리로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마을은 천북면사무소를 비롯한, 천북농협, 천북초등학교, 천북우체국 등이 자리하고 있는 천북면의 중심이다.
천북면의 중심
이 마을은 총 332가구에서 1천28명(1리 148가구 480명, 2리 194가구 548명)이 생활하고 있다.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고, 한우 800여 마리(1리 500마리, 2리 300마리)를 기르고 있다. 2리는 상가가 많은 편이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1리에 신수근(96 서당골댁) 할머니, 2리에 황기출(91 화방댁) 할머니이다.
동제 이 마을은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동제를 지낸다. 마을 공동경비로 제수를 마련하고 이장 ․ 새마을지도자가 제관이 된다. 동산1 ․ 2리 주민 모두가 함께 지낸다.
당목 이 마을의 당나무는 본래 새터에 오랜 소나무가 있었는데 얼마 전 낙뢰로 죽고, 지금은 수령 40년의 느티나무를 당목으로 모신다. 마을 위쪽(동쪽) 소리못과의 경계지점 도로변에 있다.
총 332가구 1천28명의 큰 마을
덮마을 마을 가운데로 개울이 흘러 늪을 이루고 있었는데 덮을 막아 물길을 돌리고 마을을 이루니 ‘덮마을’, ‘듬마을’, ‘들마을’, ‘늪마을’이라 부렀으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 ․ 폐합으로 ‘동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덮은 섶과 같은 나무를 이용해 물길을 막은 방천으로 지금의 천북면사무소 북쪽지점 즉 동산1리 마을회관 뒤쪽에서 약간 서쪽지점에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 위쪽은 ‘덮머리’, 아래쪽은 ‘덮밑’이라고 한다. 1995년경에 마을 가운데로 흐르던 거랑을 덮고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를 만들었다.
새터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터’라고 했으며, ‘신기(新基)’, ‘새각단’이라고도 한다. 덮마을 서쪽에 있다.
또는 조선시대에 큰 홍수로 마을이 폐허가 된 것을 새로 마을을 개척하여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중마을 덮마을 앞쪽 가운데에 있는 마을로 ‘중말’, ‘중리(中里)’라고도 한다. 마을의 중심이 되는 곳에 위치해 있다고 ‘중마을’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마을이 가장 일찍이 들어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현재는 3가구만 남아 있다.
고인돌 1기 모텔부지에 묻혀
동원재(東原齋) 정재(靜齋) 최신익(崔臣翼)과 동와(東窩) 최진우(崔震寓)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조선 고종 18년(1881)에 세운 것을 1989년 후손들이 동산리 165번지에 이전하여 다시 세웠다. 최진우는 조선 태조 때 성균관사성(城均館司成)을 지낸 최예(崔汭)의 5세손으로 훈도를 지냈다.
동산재 세종 때 훈련원참군(訓練院參軍)을 지낸 경주인 최상정(崔尙亭)과 세조 때 훈련원참군을 지낸 그의 아들 최우강(崔祐江)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세운 재사였으나 낡고 관리가 안 되어 10년전에 건물을 헐었다고 한다. 이 재사는 조선 인조 때 세우고, 고종 때 중수하였으며, 1982년에도 해우암곡에 다시 세웠으나 지금은 허물고 없다.
동산리 지석묘군(東山里支石墓群) 소리못 밑에 3기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논 가운데 2기의 고인돌만 확인된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본래 이곳에 3기의 고인돌이 나란히 있었으나 모텔이 들어서면서 1기는 묻혀있다고 한다. 이 고인돌은 고임돌[支石]은 모두 없어지고 덮개돌[蓋石]만 남아 있다.
1950년대까지 동산장 열려
대밭등 뒷등이라고도 한다. 마을 뒤에 둘러져 있는 등성이다.
너구리제 동산에서 모아로 넘어가는 고개로 너구리가 많았다고 한다. 신당과 경계지점에 있다. 이곳은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소동나무골 동산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산 전체가 토기조각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오동나무보다 열매가 작은 소동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해구나무골 동산재가 있는 골짜기로, ‘해우암골’이라고도 한다.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절골’이라고도 한다.
휘미골 동산의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현재 낚시터 있는 곳이다.
소미기들 천북 신당과 동산의 경계지점으로 양쪽에서 산자락이 내려와 좁고 잘록한 곳에 있는 들이라 ‘소미기’, ‘소항평(小項坪)’이라고도 한다.
동산못 중마을 서북쪽에 있는 못으로 ‘동산지(東山池)’, ‘동산제(東山堤)’라고도 한다.
소동나무골 못 소동나무골에 있는 못. 작은 웅덩이다
휘미골못 휘미골에 있는 못으로 지금 유료낚시터로 활용되고 있다.
안터 절골 앞에 안온하게 자리하고 있는 곳에 집이 있던 터이다.
장터 파출소 앞에 있던 ‘동산장’으로 1950년대까지 장이 섰다고 한다.
천북면사무소 들어오는 길 확포장
이 마을은 330여 가구에서 1천여 명이 생활하는 큰 마을이며, 면소재지이지만 인심 좋고, 단합이 잘 되고, 범죄가 없는 마을로 유명하다.
이 마을 주민들은 7번 국도에서 이 마을 천북면사무소까지의 진입로가 너무 좁고, 인도가 없어 교통사고에 늘 노출되어 대단히 위험하다고 한다. 이 도로의 확포장이 빨리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동산1리에 유병랑(70 전 법무부 출입국장), 이정우(70 전 경주시청 국제교류과장), 손태헌(65 전 천북면장), 최임락(43 건교부 서기관), 이상록(41 삼성그룹) 등이 있고, 동산2리는 유성근(79 전 천북면장), 류원규(70 전 천북농협조합장), 김영신(67 전 평통위원), 최해동(60 천북농협조합장), 김덕윤(58 황성동장), 권혁도(58 선도동장), 이철우(58 동천동장), 유병구(57 인하대교수), 김병창(56 한국경영평가원 부원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