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적 말발굽 붙어 빌어 ‘빌기’ 일제 때 악의적으로 ‘비지(飛只)’로       내남면 비지1리(飛只一里)   시기와 질투가 인간의 전유물만은 아닌가 보다. 대자연의 큰 흐름에서 조차 시기질투는 있으니. 봄을 맞아 새싹과 꽃이 아름답게 피어날 무렵이면 꼭 이를 시기하고 샘하는 한차례의 매서운 추위가 몰아친다. 이른바 꽃샘추위.     비지1리 아니 빌기로 마을 탐방을 나간 날은 개구리도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이었다. 그러나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렸고, 쌀쌀맞은 바람은 여민 옷깃을 헤집고 살을 파고들었다.   비지는 단석산(827.2m) 동남쪽 골짜기에 위치한 산골 마을이다. 내남 상신과 박달의 안 골짜기이며, 지금 경부고속철도 역사건립이 한창인 화천리 남쪽 산 너머에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은 화천리에서 내남으로 넘어가는 지방도 904호선을 따라 가든지, 내남 이조를 통해 상신과 박달을 거쳐 가도 된다. 시간과 거리엔 큰 차이는 없지만 경주시내에서 가기는 화천리로 가는 길이 좀 더 가깝다.     비지는 본래 ‘빌기’라고 불렸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이 곳을 지나는데 말발굽이 떨어지지 않아 뒷산 배암(拜岩)에 빌었으므로 ‘빌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학산(鶴山) 아래에 있으므로 ‘학동(鶴洞)’이라고도 불렀다.   마을주민들 ‘학동’ 선호   이 마을이 비지가 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의 일로 인근의 점말, 돌곶이, 반탕골을 병합해 ‘비지리(飛只里)’가 되었다. ‘빌기’를 굳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학산(鶴山)을 의식해 ‘새는 다만 날뿐’이라는 악의적인 의도로 ‘비지(飛只)’로 표기했다고 주민들은 믿고 있다. 뜻뿐만 아니라 어감마저 좋지 않아 마을이름을 학동으로 고치려고 애를 썼지만 아직 고치지 못했다고 한다. 마을 어귀에는 주민들의 뜻을 반영한 ‘학동’이라고 새긴 표시석이 서있다. 지금 학동과 비지가 혼용되고 있어 혼란스럽고 마땅히 학동으로 바뀌어야 한다.   일제가 의도적으로 왜곡한 마을이름이나 땅이름에 대해서 행정당국이 나서서 바로 잡아야 할 때다. 더구나 주민들이 원한다면 당연히 선처해야 할 것이다.     빌기(학동)·반탕골이 비지1리, 점말·돌곶이가 비지2리를 이루고 있다.   비지1리는 비록 산골마을이지만 논 48ha, 밭 43ha 등 30만평에 이르는 넓은 농토와 풍부한 물을 지닌 살기 좋은 마을이다. 학동이 68가구, 반탕골 34가구로 현재 102가구가 생활하고 있다. 벼농사를 주로 고추, 담배, 한지 등을 생산했으나 지금은 담배는 없고, 고추 2만5천평을 재배하고, 한우를 32가구에서 300여두 기르고 있다. 한지는 공장이 3개 있었으나 지금은 1개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30만평 농토 지닌 부자마을   학동(빌기) 임진왜란 때 왜적이 이 마을에 이르자 말발굽이 붙어 꼼짝하지 않아 뒷산의 배암(拜岩)에 가서 빌었더니 비로소 말발굽이 떨어졌는데 이러한 연유로 ‘빌기’라 불렀다고 한다. 또 학산(鶴山)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학동(鶴洞)’이라고도 한다. 한 때 140호에 이르는 내남면에서 제일 큰 마을이라 ‘대동’, ‘큰마을’이라고도 불렀다. 지금은 내남면에서 4번째로 큰 마을이다.   당목 마을 입구의 장정 7아름 반이나 되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아랫둥치에 장정 4명이 들어가 앉을 정도로 큰 구멍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이 그 안에서 비를 피하며 불을 쬐다가 그만 안에서 불을 내어 나무가 안으로부터 불 타 이틀간이나 탔다고 한다. 지금 당목은 그 나무 자리 가운데에 다시 심었다고 한다.      반탕골 빌기의 서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 남서쪽에 말오줌바우가 있는데, 여기서 떨어지는 폭포수가 마치 말이 오줌을 누는 것과 흡사하다고 한다. 이 폭포 밑에는 넓고 펀펀한 바위가 있어서, 예로부터 이 바위에서 신선들이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하여지며, 여기에 따라 마을이름을 ‘반탕골’, ‘반통리(盤通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가구수나 주민수가 늘 큰 마을의 절반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큰 마을의 절반이다. 그래서 ‘반동(半同)’이라고도 한다.     동제 이 마을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동제를 지냈으나 1972년 마을길을 넓히면서 당목인 느티나무를 없애고 난 후로는 지내지 않는다. 당시 당나무 뿌리를 괴목으로 다듬어 경주고속터미널 2층 여정다방에서 300만원을 붙여 전시해 놓았다고 한다.   ‘저기 산이 걸어간다’   영모제(永慕齊) 1977년 반탕골에 건립한 옥산전씨들의 제실이다. 3칸 기와집의 이 제실은 담장도 허물어지고 건물도 오랜 동안 방치한 듯 많이 훼손된 상태다.   당재말랭이 화천에서 학동으로 넘어오는 등성이, 성황당이 있었다. 큰 참느릅나무가 있었는데 길을 내면서 그 아래를 파서 태풍에 넘어졌다.   와우산(臥牛山) 학동과 건천읍 화천리에 걸쳐 있는 높이 280m의 산으로 마치 소가 누워있는 모습이다. ‘분등말리’라고 한다.   학산(鶴山) 비지리와 박달리에 걸쳐 있는 높이 358m의 학동마을 앞산으로 황새미기라고 했다. 옛날에 이 산이 마을 앞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빨래하던 여자들이 “저기 산이 간다”고 소리쳐 그만 이 자리에 섰다고 한다. 더 걸어가야 큰 인물이 나는데 그래서 인물이 없다고 한다. 이 산에는 왜놈들이 혈을 눌러 박은 쇠말뚝이 있었으나 지금은 삭아지고 없다고 한다.     당재 반탕골 서남쪽에서 산내면 내일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마당재 뒷밑잔 정상에 마당처럼 넓은 평야지가 있다. 빌기에서 건천읍 방내리로 넘어간다.     버들미기 빌기에서 건천읍 화천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큰 고개 서쪽에 있다.   장고개 빌기 서북쪽에서 당시 모량 장으로 넘어가는 고개. 화장골 만디다.   큰고개 서낭당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당재고개라고도 부르는 큰 고개로, 점말 북쪽에서 건천읍 화천리 백석으로 넘어간다.   피밭골재 반탕골에서 산내면 내일리 수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피밭골 위에 있다. 총각들 작대기로 쑤셔     숯건등 숯을 구웠던 숯굴이 있었던 등성이로 숯을 ‘숯껑’이라고 하는데서 유래되었다.   꽃바우등대 화암산 가운데 바위가 여자의 성기처럼 생겨 ‘꽃바우’라고 부른다. 옛날에 총각들이 장가 못가면 이 바위를 쑤시고 기다리면 장가갔다고 한다. 마을에서 그 바위가 보이면 바람난다고 해 그 앞에 소나무 심어 가렸는데 30여 년 전에 그걸 베어서 마을회관을 지었다고 한다.   분솔밭 솔밭이 있었다고 하는 등성이로, 딧삐알 동쪽에 있다.   참나무갓등 참나무가 많았다고 하는 등성이로, 피밭골 동쪽에 있다.  초막골 폭포 이곳 물을 맞으면 피부병이 잘 나았다는 약수이다. 높이 5m에 이르는 이 폭포는 화장골 안쪽 초막골에 있다. 지금은 마을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폭포 위에 호수를 묻어 수량이 줄어 폭포물이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정도였다. 그리고 이곳의 오염이 심해 4~5년 전부터 일반인의 출입을 막았다.   큰갓등 큰 말림갓이 있었다고 하는 등성이로, 절골과 화장골 사이의 큰 등성이다.    팔밭등 팔밭이 있던 등성이다. 불을 질러 일군 밭(화전)을 팔밭이라고 한다. 이곳에 주로 여름무시(무)를 심었으며 이를 팔밭무시라고 한다.   절골 학동 서북쪽 단석산 골짜기로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 지은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불타고 없어진 자리에 논을 만들어 농사지었는데 지금은 묵히고 있다. 절 위 큰갓 등대에 명당자리가 있는데 옛날 손씨네가 이곳에 묘를 쓰려고 하였는데 이 절 스님이 (묘를)못하게 하니까 거짓 상여는 마을로 들어오고, 진짜 상여는 방내로 들어와 결국은 절 뒷산 명당에 묘를 썼다. 그러자 스님이 빵쇠를 쳐서 훼방을 놓았다. 그래서 절도 망하고 묘 쓴 후손들도 잘 안 됐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나작골 배나무골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 화장골 동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배나무골 배나무가 있었다고 하는 골짜기로, 뒤밑잔(마을뒷산)에 있다. 지금도 돌배가 더러 있다.   독죽골 텃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이곳에 목이 떨어진 돌부처가 있었다는데, 1930년 경 기독교 신자가 가져가서 돌절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케이 목장 올라가는 골짜기다.   소망태 소 망태기처럼 골짜기가 들어가서 오막하게 생겼다. 절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여기가 형산강 발원지이다.   야모골 곧은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구들돌을 떼는 산이다.   약물탕골  땀띠에 좋은 약물이 났다고 하는 골짜기로, 반탕골 서쪽에 있다.   천출네 팔밭  천출이라는 사람이 일군 팔밭(화전)이 있었던 골짜기로, 소망태 서쪽에 있다.   텃골  절골 서쪽 어귀에 있는 골짜기로, 집터가 있었다고 한다.   피밭골  피나무가 많았던 골짜기로, 반탕골 서쪽에 있다.   화장골  김유신 장군이 활을 쏜 자리라고 전해 온다. 또 중을 화장하던 곳이라고도 한다. 절골 오른쪽 골짜기다.   처자웅딩이 처녀들이 목욕하던 웅덩이. 화장골 어귀의 계곡에 있는 이 웅덩이는 바위가 앞을 가리고 있고, 지금도 맑은 물이 흘러 여자들이 목욕하기 좋은 천혜의 웅덩이였다.    기우제, 3시간 아님 3일에 비 와   가메바우 옛날에 해일로 물이 차서 가마 하나 놓을 자리만 남았다고 한다. 가물 때 무제를 지내던 곳으로 신라시대에 임금이 직접 올라가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라고 전한다. 바위에 웅덩이가 3개 있는데 그 곳에 고인 물을 퍼내고 불을 피우고 닭 피를 뿌리면 틀림없이 비가 내린다고 한다. 무제를 지내면 3시간 후에 비가 안 오면 3일 후에는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 농바우 마을 뒷산에 마치 농(옷장)처럼 포개진 바위다. 불선바우 맞은편에 있다.   불선바우 영검하다고 하여, 동네 아낙들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 불을 밝혀 치성을 드리던 바위로, 다래삐알 가운데 있다.   등굴바우 바위가 툭 튀어나와 그 아래에 방만한 굴이 있다. 비지1,2리 경계에 거랑 가에 있는 영험 있는 바위로 아들 못 낳는 사람들이 이 곳에 빌어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 마을 이장도 이 바위에 빌어서 낳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 바위 아래에는 촛불을 켜고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앞에 큰 웅덩이가 있어 용왕신이 있다고 믿는다.   말오줌바우 반탕골 서남쪽에 있는 바위로, 이 바위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마치 말이 오줌을 누는 것 같다고 하여, 말오줌바우라 부른다고 한다.   물바우 바위틈에서 물이 새어 나오는 큰갓등 위에 있는 바위로 그 능성이를 물바우등대라고 한다. 아무리 가물어도 이곳에는 물이 나온다고 한다.   쉼바우 나무꾼이 나무하러 다닐 때 쉬는 바위로 화장골에 있다.   색이바우 석이(石耳)가 났다고 하는 바위로, 색이바우등에 있다.   수리바우 독수리가 새끼를 치고 살았다는 바위로, 참나무갓등 위에 있다.   시앙바우 빌기의 서남쪽 산에 있는 바위. OK목장 바로 아래다.   쥐바우 꼬내기바우 위쪽에 있는 바위.   말미들 밭답 위쪽에 있는 들. 임진왜란 때 왜적이 이곳을 지나다가 말발굽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못하므로, 왜장이 제사를 지내고 빌었더니 말발굽이 떨어졌다고 한다. ‘말미’라고도 한다.   모잔들 학동 남쪽에 있는 큰 들로. 그 위에 못이 있다.   밭답 밭을 개간하여 만든 논이라 ‘밭답’ 또는 ‘밭답엣들’이라 하는데 학교 앞의 들이다.    솔정지 반탕골 남쪽에 있는 들로, 소나무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쉰질웅덩이 깊이가 쉰 길이나 된다고 하는 소(沼)로, 절골 어귀 모잔보 바로 위에 있다. 지금은 2m 정도 밖에 안 된다.   모잔보 절골에서 내려오는 물을 마을 앞 들까지 끌어 왔다. 10리도 넘는다. 보 옆 바위에는 ‘崇禎000 己未 十二月 重修 都監 李公景仁 永世不忘’라 새겨놓았다. 이글에 따르면 1679년 12월에 중수했으며 도감은 이경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 이 보를 막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330년 이전임을 알 수다. 지금까지도 이 물을 사용하고 있다.   숲거리 마을 어귀에 인공으로 조성한 숲이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베었으며 30년 전까지도 몇 그루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숲이 없다. 전통문화 되살린 ‘나다리’   나다리 옛날에 모를 심어 놓고 아시논매고(초벌김매기) 좀 조용한 때를 잡아 머슴들에게 회식을 시켜주는 풍습이다. 마을 대표가 그 형편에 따라 집집마다 음식을 배정하여 온 마을이 십시일반 음식을 내 놓고 잔치를 벌이고 일꾼들은 이날 하루 편안하게 먹고 즐긴다. 이 행사를 2005년부터 부활시켰다. 한해는 경로잔치 하고 한해는 나다리를 한다고 한다. 잊혀져가는 우리 선조들의 아름다운 전통문화를 되살리는 일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다. 이를 통해 함께 더불어 살아가던 살맛나는 세상은 만들어지는 것일 게다.   박달숲속명상학교 폐교된 학동초등학교에 최근 박달숲속명상학교(대표 최경락 50)가 들어서 있다. 학동초등학교는 1963년 6월에 개교했다가 2002년 3월 경주초등학교에 통합되었다. 농로와 수로 정비 시급해   단석산 아래 제일 가까운 마을 빌기. 때문에 산돼지, 노루, 너구리 등 야생동물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고구마는 아예 수확할게 없고, 짐승들이 민가에까지 내려와 주민들의 인명피해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숲이 짙어지니 산나물도 나지 않고 짐승들만 설친다며 산불이라도 나야한다고 했다.   이 마을은 농로와 수로의 정비가 시급한 실정이다. 마을주민들이 고령화되어 가는데 농수로가 정비되지 않아 해마다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진입로가 폐교된 학동초등학교까지는 2차선 되어 있고, 거기서부터 OK목장까지 그 도로를 연결한다고 했는데 더 이상 진행이 안 되고 있다. 이 도로의 확·포장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이 마을의 최고령자는 올해 94세의 김천쇠(학동어른)할아버지와 고분이(89)할머니 부부이다. 할머니가 17살 되는 해에 동네 혼사를 통해 슬하에 2남 4여, 6남매를 두고 평생을 이 마을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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