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찾아서>>현곡면 소현1리(小見一里)
경주에서 작게 보여 ‘소현(小見)’
신라 때 효자 손순 유허비
소현(小見)은 현곡면에 속한 마을로 신라 흥덕왕 때의 효자 손순의 유허비가 있는 효자마을이다. 금장에서 영천으로 이어지는 927번 지방도를 따라 영천방면으로 가다가 현곡농협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소현거랑을 건너는 소현다리가 있고, 이 다리를 넘으면 안태봉과 질메산을 끼고 펼쳐진 마을이 소현이다.
소현은 본래 신라 때 효자 손순(孫順)의 이름을 딴 순우정(順友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마을이름을 ‘순우정’이라 불러오다가 손씨들이 자신들의 선조 이름자를 마을이름에 붙인다고 싫어해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지일(智日)을 병합하여 ‘소현’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소현은 경주에서 볼 때 이 마을의 질메산(마을뒷산)이 작게 보인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소현을 소현 1리(126가구), 지일을 소현 2리(30여 가구)라 한다.
배농사로 연간 4억5천만원
소현1리는 크게 한 마을을 이루고 있지만 이를 자세히 나누면 ‘밖말’과 ‘중각단’,‘골안’,‘당수골’ 등 4개의 마을로 나뉜다.
이 마을은 벼농사와 배 농사에 주력하고 있다.
배는 32가구가 4만5천평에서 연간 4억5천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현곡배 중에서 내태2리 다음으로 많이 생산하고 있다. 그 외에 소 100두 정도를 사육하고 있다. 밖마을은 잘 사는 편이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형편이 빈곤해서 ‘밖마을 사람들은 밥 먹고, 주마을 사람 죽 먹고, 골안 사람 곤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동제는 매년 정월 보름날에 지내고 있다.
당목은 500년 된 느티나무인데 마을 중앙에 있다.
효자마을로 불효자 없어
밖말 소현 입구에 있는 마을로 중각단의 밖에 있다고 하여 ‘밖마을’, ‘밖말’이라고 불린다. (40가구)
중각단 소현의 가운데 있는 마을로 ‘주각단’이라고도 한다. (20가구)
골안 원래는 중각단 위쪽에 있는 마을로 골짜기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골안’이라고 불렀다. 아랫각단의 건너편에 있다고 하여 ‘건너각단’이라고도 불린다. (40가구)
당수골 중각단의 위쪽, 곧 골안 맞은편에 있는 마을로 뒤에 마당같이 평평한 산자락에 소나무 숲이 있으므로 ‘당수골’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마을 위에 ‘상숫당’이라는 지명도 있어 옛날에 당목이나 당집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20가구)
아이 버리려다 돌종 캐
양경공부조묘 및 영당(良景公不示北廟 影堂) 조선 태종 때 박포난에 공을 세우고 예조판서를 지낸 좌명공신(佐命功臣) 양경공(良景公) 서유(徐愈)를 모신 부조묘. 영당에는 영정(影幀)을 비롯하여 태조어서(太祖御書), 단서철권(丹書鐵券) 교지(敎旨)등이 보관되어 있다.
손순유허비(孫順遺墟碑) 신라 때의 효자 손순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운 비다. 현재의 비석은 1970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손순은 품팔이로 어렵게 살면서도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했다. 그런데 어린자식이 노모의 음식을 자꾸 빼앗아 먹는 것을 보고 아내와 의논하기를 “자식은 또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을 수 없으니 아이를 버리자”하고 취산(醉山) 북쪽에 올라가 아이를 묻기 위해 땅을 파는데 돌종이 나왔다.
이상하게 여겨 아이를 도로 데리고 와 종을 집에 매달아 놓고 날마다 쳤다. 이 연유를 알게 된 왕은 손순의 효성을 칭찬하여 집과 쌀 50섬을 하사했다. 손순은 그가 살던 집을 시주하여 홍효사(弘孝寺)를 짓고 석종을 걸어 놓았으나, 후백제 도적떼가 쳐들어와 빼앗아 갔다고 전한다. 현곡 남사리에 홍효사터로 알려지고 있는 터가 있다.
순우정(順友亭)터 신라 때의 효자 손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정자인 순우정의 터로, 손순유허비 부근에 있었다고 전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어딘지 모른다.
문효사(文孝伺) 신라 42대 흥덕왕 때의 효자 문효공(文孝公) 손순(孫順)의 효를 기리기 위하여 1992년대 그의 후손들이 세운 사당으로, 효자 손순유허비 동쪽에 있다.
이천서씨종택(利川徐氏宗宅) 이천서씨의 전국 종가 집으로 밖마을에 있다. 종가와 부조묘, 영당이 같이 있다. 종부인 장자남(81) 할머니와 종손 서세붕(41)씨가 생활하고 있다.
신라왕들의 안태 무덤
안태봉(安胎峰 337m) 현곡면 소현리와 나원리의 접경에 있는 산으로 신라 역대 왕의 안태를 묻었다는 안태총이 있다. 다른 이야기는 옛날 가뭄이 심했을 때 임산부가 이 산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내자, 비가 왔다고 하고, 또 해일이 덮쳐 산봉우리가 안태만큼 남아 ‘안태봉’이라고 했다는 전설도 있다.
안태총(安胎塚) 안태봉 위에 있는 신라 때 역대 왕의 안태를 묻은 흙무덤이다.
질매산 밖말숲 바로 위쪽에 있는 산으로, 소의 질매 모양같이 생겼다 해서 ‘질매산’이라고 한다.
안산 골안 마을 남쪽에 있는 산으로, 골안 사람들의 눈앞에 있는 것처럼 가까이 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어귀에 옛날에 불상이 있었던 곳이라 ‘부처밭거랑’이라고 부른다.
솔티개미 큰갓골들 동쪽에 있는 산으로, 소나무 밑에 왕개미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공동산 고동굴못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마을 공동산이었으나 지금은 사유지로 되어 있다. 공동묘지가 있다
뿔건디 가남들 동쪽에 있는 산으로 흙이 붉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 가팔라 말이 넘어진 ‘말구불재’
곧은골 골짜기가 곧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곧은골 안망챙이 고동골 막바지의 골짜기.
군재이 말구부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군지라고도 한다.
동녘골 말구불재 동쪽에 있는 산골짜기라고해서 붙은 이름이다.
만수밭골짜기 고동골못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만수라는 사람이 밭을 일구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묵지가 되어 있다.
말구불재 말구불터널 오른쪽에 있는 고개로 금당, 사방으로 넘어 가는 고개다. 산이 높고 가팔라서 지나가던 말이 굴렀다고 해 ‘말구붓재’ 또는 ‘말구불재’라고 한다. 이 고개 정상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바란골 진군지 북쪽에 있으며, 골짜기가 진군지에서 볼 때 똑바로 바르게 잘 보인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불탄골 섬들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산기슭에 있던 절이 불탄 흔적이 남아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솟고개 안산 서쪽에 있는 고개로, 이 고개를 넘으면 무과리가 된다. 고개가 작다고 하여 소(小)고개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소를 묻었던 곳이라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양자골 동구니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양동사람의 묘가 있어 ‘양자골’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잿고개 솟고개와 무과고개 사이에 있는 고개. 이 고개를 넘으면 무과리가 된다. 포항~건천 IC간 자동차전용도로의 개설로 인해 현재는 고개의 일부만 남아 있다.
점골 말굴불터널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사기를 구웠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진군지 바란골 동남쪽에 있으며, 골짜기가 질다(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큰군지’,‘큰군정’,‘큰군재’라고도 한다.
큰갓골 안태봉 밑에 있는 골짜기로 크고 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홍두깨골 서낭미기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홍두깨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업도로가 생기면서 반 정도 떨어져 나갔다.
새갓골 부자미등 서쪽에 있는 골짜기. 사이에 끼인 작은 골짜기라고.
생이집 골짜기 질매산과 안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생이집(상여집)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매일 천냥을 뿌리고 굶어죽은 만석꾼
부자미등 호걸이며 만석꾼이었던 이천서씨의 묘가 있어 부자미등이라고 한다. 큰갓골못 서쪽 산등성이에 있다. 옛날 경주의 3대 호걸로 꼽히던 만석꾼 서호걸이 이 마을에 살았는데 어느 날 유명한 관상쟁이가 이 집에 찾아와 말하기를 ‘당신은 죽을 때 굶어죽을 상’이라 했다. 하루에 천냥씩을 뿌려도 다 못 쓰고 죽는데 무슨 엉뚱한 소리냐며 당장 관상쟁이를 쳐 죽인 서호걸은 그날 이후 매일 북문안 성 만디에 올라가 돈 천냥씩을 뿌렸는데 고쟁이를 입고 돈을 줍는 기생들의 궁디(엉덩이) 구경하다가 결국은 굶어 죽었다고 한다.
가맷등 섬들 북쪽에 있는 산등성이로, 산 모양이 가마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너븐버설 고동골 북쪽에 있는 산등성이로, 넓고 편편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애기미땅 부자미땅 위에 있는 처녀무덤이라고 한다. 양지바른 곳으로 나무하러 다닐 때 쉬는 자리라고 한다.
서낭미기 말구불터널 산꼭대기에 있던 서낭당으로, 말구불재를 넘나들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돈구디 옛날 나무꾼들이 돈치기와 장치기를 하며 놀던 곳으로 말구불과 고동골로 가는 사이에 있다.
피부병에 효험 있는 약물내기
산수땅 부자미땅 밑. 당수골 마을 뒤에 있는 소나무 숲. 이천서씨의 묘가 있다. 잔디가 잘 조성되어 있어서 마을사람들의 놀이터였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이곳 산세가 뱀의 머리 같이 생겼다 하여 산수(山首)땅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밖말숲 소현 입구에 있는 숲으로, 이곳에 손순 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당수나무가 있는 숲골까지 연결된 숲으로 지금은 논으로 개간되었다.
약물내기 피부병에 효험이 있는 약물이 나던 골짜기로, 동녘골 동쪽에 있다. 옛날에는 목욕하러 많이 왔다고 한다. 땀띠, 종기 등 피부병 난 사람들이 목욕하면 다 나았다고 한다. 지금도 비가 오나 가뭄에도 물이 일정하게 나온다.
웃웅굴 골안마을 위쪽의 우물로, 우물을 옛날에는 ‘웅굴’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농업용수로 사용되고 있다.
뽕남배기 진사랫들 동쪽에 있는 들로, 예전에 뽕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6.25 때 까지도 뽕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가남들 골안 동쪽에 있는 들로 예전에 감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해서 ‘감남들’이라 부르던 게 ‘가남들’로 변했다.
섬들 고동골과 말굴불로 가는 사이에 있는 들로, 양쪽으로 물이 흐르고 섬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황룡굴 현곡초등학교 동남쪽에 있는 들이다.
곧은골 못 만수밭골짜기 동편에 있는 못으로 일제시대에 축조되었다.
큰갓골 못 큰갓골에 있는 못으로 1950년대에 막았다.
가남들보 가남들에 물을 대는 보로 산업도로 나면서 없어졌다.
90살 넘은 어른 7명이나
예로부터 효자마을로 알려진 이 마을은 지금도 젊은 사람들이 어른을 잘 모시는 효자마을이라고 한다. 또한 보기 드문 장수마을이다. 90살 넘은 어른이 7명이나 된다. 80살 된 할머니는 아직 심부름을 해야 한다고 한다. 이 마을 최고령자할머니와 이말란(96·도화댁)할머니로 시누올케간이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서해철(79·전 나원초등학교 교장), 손원호(69·전 포항부시장), 최광식(65·현곡농협 조합장), 홍동율(58·성건우체국장), 서병일(57·예비역 육군 중령), 정석호(51·경주시의원), 김하룡(40·안강 한의사) 등이다.
이 마을 주민들은 마을안길 확포장과 농수로 정비를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