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파리는 아직도 계절을 잊은 듯한데, 못생긴 모과의 반지르한 껍질이 조금씩 노랗게 물들어간다. 올봄 그렇게 화사함을 솜방망이처럼 날리던 벚나무에도 잎이 아래로부터 하나씩 가을을 머금고, 성장(盛粧)한 황진이마냥 방긋방긋 한다.
반월성을 나와 신작로를 건너면 넓이를 가늠키 어려운 서라벌 정원이 화려했던 옛 시절을 잊지 못하고, 간간히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온 몸을 내맡기며 속내를 살포시 내보인다.
이곳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14년(674) 기사에 ‘2월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금(珍禽: 귀한 날짐승)과 기수(奇獸: 성서로운 동물)를 길렀다’라고 전하는 안압지(雁鴨池)이다.
또한 35대 경덕왕 19년(760) ‘2월에 궁중에 큰 못을 팠다’라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문무왕대에 안압지가 처음 만들어 졌다가, 경덕왕대에 개축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후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던 기사가 31대 효소왕 6년 9월에 보이고, 36대 혜공왕 5년 3월에도 나타나는 등 여러 차례라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왕이 군신들이나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던 장소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1975년 발굴 조사에서 무덤의 껴묻거리 와는 다르게 실생활에서 사용한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유물 중 주사위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주사위 면은 정사각형 면이 6개, 육각형 면이 8개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각 면마다 한자 4글자 정도씩이 새겨져 있고, 그 내용은 주사위를 굴려서 나타나는 글의 내용에 따라 벌칙을 하도록 되어 있다.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술 세잔 한 번에 마시기, 스스로 노래 부르고 스스로 마시기, 술을 다 마시고 크게 웃기, 덤벼드는 사람이 있어도 가만히 있기, 소리 없이 춤추기, 여러 사람이 코 때리기, 얼굴을 간지럽게 하여도 꼼짝 않고 있기,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노래를 청하기, 팔뚝을 구부린 채 다 마시기, 술 2잔이면 쏟아 버리기, 스스로 괴래만(怪來晩)이라는 노래 부르기, 월경(月鏡) 한 곡 부르기, 더러운 것을 버리지 않기, 시 한 수 읊기 등등이다.
주사위에 적힌 벌칙 내용을 보면, 오늘날 국적 없는 한풀이식 놀이문화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어찌 보면 우리네 서라벌 선인(先人)들은 그들의 찬란한 물질문명 속에 한층 성숙한 정신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다시한번 깨닫게 해주는 사례라 하겠다.
때는 신라 47대 헌안왕 4년 9월에 왕이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와 연회를 할 때였다. 이제 나이 열다섯 살인 화랑국선 응렴에게 왕이 물었다. ‘낭(郎)이 국선이 되어 사방으로 유람하는 중에 무슨 특이한 일을 본 것이 없는가?’ 하니, 낭이 말하기를 ‘저는 행실이 얌전한 사람 셋을 보았습니다. 남의 윗자리에 있으면서 겸손하게도 남의 아랫자리에 가서 앉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것이
첫째요, 드센 부자로서 검소한 의복을 입는 사람을 보았는데 이것이 둘째요, 근본이 세도 양반으로서 위세를 부리지 않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것이 셋째입니다’ 하였다. 이 말은 들은 헌안왕은 그가 현명함을 알고, 사위로 삼으려고 하였다. 이 때 왕의 맏딸은 20살이고 아우는 19살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응렴은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아뢰니, 부모님은 왕의 두 딸 중에 용색(容色)이 뛰어난 아우를 택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화랑의 무리 가운데 우두머리로 있는 범교사(範敎師:삼국사기에는 흥륜사의 중이라고 한다)가 말하길 ‘형을 취하면 세 가지 이익이 있고 아우를 취하면 이와 반대로 세 가지 손해가 있으리라’ 하였다. 이에 응렴은 헌안왕의 맏딸에게 장가를 가게 되었다.
그 후 석 달이 지나 왕의 병이 위독하게 되자, 왕은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말하길 ‘과인이 불행히 아들이 없고 딸만 있으니, 우리나라 고사(故事)에 비록 선덕(27대 선덕여왕)·진덕(28대 진덕여왕) 두 여주(女主)의 예가 있었으나 이는 빈계(牝鷄)의 신(晨)에 가까운 것이라 가히 법 받을 일이 되지 못하여, 사위 응렴은 나이 비록 적으나 노성(老成)한 덕이 있으니 경 들이 이를 세워 섬기면 반드시 조종(祖宗)의 영서(令緖)를 떨어뜨림이 없을 것이므로 과인은 죽어도 썩지 않겠다’ 하였다. 이에 신하들은 응렴을 옹립하니 바로 신라 48대 경문왕이다.
경문왕이라고 하면 우리에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란 설화로 매우 낯익은 이사금이다. 15살에 화랑국선이 되어 명산대천을 유람하였고, 여기서 호연지기를 길러 마침내 헌안왕의 사위가 되어 보위를 잇게 되었던 것이다.
왕이 된 응렴이 후일 범교사에게 지난날 헌안왕의 못생긴 맏딸에게 장가를 들면 세 가지 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범교사는 말하길 ‘당시에 헌안왕과 왕비가 그 뜻대로 된 것을 기뻐하며 총애가 점점 깊어진 것이 한 가지이며, 이로 인해 왕위를 잇게 된 것이 둘째며, 앞서부터 구하려던 (前王)의 둘째 딸을 마침내 취(娶)하게 된 것이 그 셋째 이익입니다’라고 하였다.
경문왕이 헌안왕의 딸들을 놓고 이리저리 견주기도 하고, 또한 화랑의 우두머리 범교사에게 자문까지 얻어서 결혼을 하는 것을 보면 도량은 넓지만 매우 치밀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그의 치밀함으로 남의 말을 잘 듣는 이사금이라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란 설화가 서라벌에 퍼져나간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잘 때는 항상 뱀과 함께 잔다고 하여 신성한 뱀 신앙이 서라벌에 존재하였다는 흔적을 지울 수가 없다. 지금도 마을에서 뛰어난 젊은이가 어떤 일을 할라치면, 동네의 어른들은 ‘배미 잘할까’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이 말은 ‘뱀이니까 잘 할 것이다’라는 인도에서 남해를 통해 들어온 뱀 신앙의 원형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화랑국선으로 왕위에 오른 경문왕은 흐트러진 서라벌 귀족들에게 화랑이라는 전대(前代)의 정신을 되살려 말기적 현상이 나타나는 신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하였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경문왕은 그동안 명맥만 유지하던 국선 무리들에게 나라의 명산으로 유람을 장려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국가부흥운동의 일환으로 국선 요원랑(邀元郞)과 예흔랑(譽昕郞), 계원(桂元), 숙종랑(叔宗郞) 등이 금란(金蘭:강원도 통천지방)을 유람하였다. 이 때 국선의 무리들은 임금을 위하여 나라를 다스릴 노래 세 수를 지어, 심필사지(心弼舍知)를 시켜 주었다. 이 초고를 이용하여 대구화상(大矩和尙)이 세 곡의 노래를 지었다. 노래는 현금포곡(玄琴抱曲), 대도곡(大道曲), 문군곡(問群曲)이다. 이 노래를 왕에게 바치니 경문왕은 매우 기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이 노래를 향가로 보는 이유는 첫째 화랑들이 지어 불렀다면 향가의 주요담당층이 화랑이었다는 것에서 그렇고, 둘째 51대 진성왕대에 향가집 <삼대목>을 지은 사람 중의 한명이 대구화상이기 때문이다.
비록 향가집 <삼대목>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 없지만, 신라하대 진성여왕대까지 지속적으로 향가가 서라벌인들에게 향유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오늘날 이웃나라 일본은 우리의 향가집 <삼대목>과 비슷한 시기의 시가집 <만엽집>이 남아 있어 그들이 문화민족임을 내세우는 증거로 삼고 있지만, 우리 서라벌에도 이에 못지않은 높은 수준의 시가가 널리 불리어졌으며, 또한 책으로도 편찬되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그 어느 날 우리 앞에 나타날지도 모를 향가집 <삼대목>을 위해 향가 한 수쯤 익혀두는 지혜가 필요한 때인지도 모를 일이다.
박 진 환 프리랜스 기자<pjw322@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