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란 안부나 소식 그리고 용무를 적어 보내는 글을 말하지만, 애정과 진실, 믿음이 담긴 편지는 곧 사랑이요, 마음이요, 거울이다.   1998년 봄날, 텔레비전 뉴스와 일간지에 믿기조차 어려운 화제 거리가 소개되어 전국에 소문의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진원지는 경상북도 안동지방의 어느 유가(儒家)의 집안에 택지조성을 하기 위해서 오래된 분묘를 이장하던 중 4백년이 넘은 조선시대 남자의 미라와 편지 한 통이 발견된 것이다. 첫머리에 ‘원이 아버지에게’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죽은 사람의 아내가 쓴 것으로 추정이 되어 더욱 가슴 아픈 사연으로 여겨졌다.   그런 가운데 어느 소설가가 ‘원이 엄마의 편지’를 모티브로 원이 엄마와 남편의 사랑이야기를 4백년이란 시공을 뛰어 넘어 완벽하게 재창조하여 ‘능소화’란 소설을 출간했다.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 남편에게 하고픈 말이 너무 많았으나 작은 종이에 더 이상 쓸 자리가 없어 종이를 옆으로 돌려 여백을 채웠다.   당신은 언제나 저에게 둘이 머리가 희어질 때까지 살다가 함께 죽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저와 어린 아이는 이제 누구 말을 듣고, 누구를 의지하며 살라고 먼저 가십니까? 당신을 잃어버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살아갈 수가 없어 빨리 당신 곁으로 가고 싶습니다. 어서 저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은 이승에서는 잊을 수가 없어요. 이 서러운 마음을 어찌 할까요? 이내 편지 보시고 제 꿈에 와서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어째서 그토록 서둘러 가셨는지요? 어디로 가고 계시는지요?   언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는지요. 우리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어떤 운명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저는 꿈에서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무도 몰래 오셔서 보여 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습니다. 당시 원이 아버지 이응태는 기골이 장대하고 머리가 좋아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귀인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응태가 소화꽃 때문에 죽을 사주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천하의 박색(薄色-못생긴 얼굴) 여인과 결혼해야만 제 명(命)을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날로 집에 심어져 있던 소화나무를 모두 베어 내었다.   한편, 원이 엄마 ‘여늬’는 어릴 적 죽을 고비를 넘긴 후, 하늘이 정한 운명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성질 고약한 박색이란 소문을 내며 여덟 살 이후로 바깥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난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는다.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행복하기만 했던 두 사람, 그러나 소화꽃 만발한 어느 해 여름날 원이 아버지는 눈을 감는다.   저 세상에서 남편과의 재회를 믿는 ‘여늬’는 남편이 처음 소화꽃을 보고 자신을 찾아왔듯이 자신이 죽은 후에도 그럴 것이라며 자신의 무덤에 소화꽃을 심어 달라고 한다. 그리고 소화를 ‘능소화’로 바꾸어 부른다. 하늘의 뜻을 능히 이기겠다는 의지를 담아서.   이 두 사람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의 부재를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사랑의 원형이 무엇인지 보여 주며, 깊은 감명을 남겨 준다. 사랑은 이유 없이 아끼지 않고 전부를 다 주어도 부족하여 걱정하는 것이라 했다. 죽어서도 잊지 못할 사랑이 ‘능소화’로 다시 태어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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