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면 운대2리(雲臺二里) 선덕여왕 행차 기념 부운대(浮雲臺) 있어 ‘운대(雲臺)’ 주요작물 포도, 버섯, 보리, 한우   운대는 신라 선덕여왕이 이곳의 아름다운 산세와 연못을 보기 위해 행차했던 것을 기념해 훗날 나왕대(羅王臺)라는 기념대를 세웠는데, 여왕이 행차할 때 기이한 구름이 하늘에 떠 있었다고하여 부운대(浮雲臺)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마을이름도 ‘부운(浮雲)’, ‘운곡(蕓谷)’으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군곡리(裙谷里)와 신평리 일부를 병합해 ‘운대리(雲臺里)’로 불러오고 있다. 군실을 운대 1리, 부운, 밤밭골은 운대 2리를 구성하고 있다.   운대2리는 서라벌공원묘원이 있는 마을로 경주에서 새로 건설된 국도 4호선을 타고 영천방면으로 약 20km(경주시청 기점) 정도 가다가 서라벌공원묘원, 사라리의 이정표를 따라 내리면 서라벌공원묘원을 올라가는 길을 기준으로 왼쪽은 사라리이고, 오른쪽이 운대2리이다. 운대2리는 사라리와 사실상 한 마을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사라리는 소들의 떼죽음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마을로 유명하다. 그러나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운대2리는 소 피해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같은 지역에 있으면서 심지어 상수도까지 같이 쓰면서도 지번이 사라리는 소가 죽고, 운대리는 괜찮았다고 한다. 이점에 대해서는 이 마을주민들조차 신기하게 여긴다.   운대2리는 벼농사 외에 포도와 버섯, 보리, 한우 등이 주요 소득원이다. 포도농사는 10가구에서 1만5천평을 하여 연간 2억원, 버섯은 6가구가 18동에서 1억5천만원의 소득을 내고 있다고 한다. 한우는 25농가에서 300두 정도를 기르고 있다.     보리의 경우 안동종자보급소와 올보리 5만여평을 계약재배하고 있다. 주민총수는 275명으로 104가구를 이루고 생활하고 있다. 이 마을도 고령화가 심각했다.   전체 마을주민 가운데 60대 미만은 10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경주김씨, 김해김씨, 정선전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불국사 중건한 김대성 태어난 마을   부운(浮雲) 운곡(蕓谷), 운곡리(蕓谷里) 라고도 하며, 나왕대 밑에 있는 마을로, 운대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불국사·석굴암을 중건한 김대성(金大城)이 태어난 마을로 전한다.   부운은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 혹은 진덕여왕이라고도 함)이 이곳의 아름다운 산세와 어우러진 맑고 깨끗한 연못의 경치를 즐기려 행차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훗날 이를 기념하여 연못 옆 산기슭에 연꽃무늬의 받침대를 한 나왕대(羅王臺)라는 기념대를 세웠다고 한다. 또한 여왕이 행차할 때 기이한 빛깔의 구름이 하늘에 떠 있었기 때문에 부운대(浮雲臺)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마을 이름도 ‘부운’ 또는 ‘운곡(蕓谷)’ 이라 불렀다고 한다. (90가구)   밤밭골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에 밤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밤밭골’ 또는 ‘율전(栗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0가구)   당목은 느티나무로 수령 20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부운지 옆에 서있는 이 느티나무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팝나무와 나란히 같이 서 있다. 현재 동제는 지내지 않고 있다. 나왕대 1973년에 도난   나왕대(羅王臺) 옛날 신라 선덕여왕이 놀고 갔다고 하는 곳으로,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대이다. 부운 남쪽에 있으며 부운대(浮雲臺) 라고도 한다. ‘나왕대(羅王臺)’라고 새긴 연꽃무늬의 받침대가 있었으나 1973년도에 정상부에 길이 나면서 잃어버렸다.   부운못 나왕대(부운대) 밑에 있는 못으로, 부운제(浮雲堤) 라고도 한다. 2000년에 못 준설작업을 하고 난 후에 연꽃 3송이가 피었는데 지금은 1만여평의 못 면적의 반 이상이 연꽃으로 뒤덮였다. 연꽃은 천년이 지나도 발아가 된다고 했으니 혹시 선덕여왕이 보았다는 연꽃의 씨앗이 진흙 속에서 천년 잠을 자다가 깨어난 건 아닐까?   용암산(龍岩山) 부운 남쪽에 있는 산으로, 용바우가 있다. 용바우산, 용두산(龍頭山)이라고도 한다.   율산제(栗山齊)는 팔작지붕에 3칸의 건물로 참봉 하용홍(河溶泓)이 자신의 증조부를 위해서 세운 제실이다. 현재 건물은 신해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기문에 적고 있다. 건물의 상태로 보아 여기에서 신해년은 1911년으로 보인다.    대밭골 옛날 대나무밭이 있던 골짜기로, 밤밭골의 북쪽에 있다. 죽전곡(竹田谷)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서라벌공원이 들어서 있다.   모산골 약구밭들의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모산곡(毛山谷)’이라고도 한다. 또 못이 많아 ‘못산골’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지금도 이곳에는 6개의 크고 작은 못이 있다.   미영밭골 쟁골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부터 미영(목화)를 많이 심었다.   구들빼골 구들빼(구들장)를 캤던 골짜기로, 너부골짝의 동쪽에 있다.   삼밭골 전에 삼밭이 있었다고 하는 골짜기로, 밤밭골 동북쪽에 있다. 기도로 곰 잡은 ‘효쳇골’   바람부짓등 운대리에 있는 등성이로, 바람이 심하게 불어 풍령등(風嶺嶝)이라고도 한다.   넙덕등 대밭골의 위쪽에 있는 넓적한 등성이   효체골 옛날 효자 곽이륜(郭爾崙)이 병든 아버지의 약으로 곰이 좋다는 소리를 듣고, 이곳에 단을 쌓고 기도하여, 마침내 하늘의 도움으로 곰을 잡아 아버지의 병을 완치시켰다고 한다. ‘효처곡(孝處谷)’, ‘효쳇골’이라고도 한다.   시너부골짝 어떤 사람의 시너부(시누이) 묘가 있다고 하는 골짜기로, 부운 동북쪽에 있다. 시네미골짝이라고도 한다.   용작골 아룡고지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이곳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한다.   재골 곽씨의 재궁(재실) 이 있었던 골짜기로, 미영밭골 서쪽에 있다. 지금은 재실이 없다.   절골 진밭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진밭골 모산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묵혀놓은 밭인 진전(陣田)이 있었다고 하여 진밭골이라고 부른다.   큰들 부운의 서남쪽에 있는 큰 들로 현재 산업도로 앞에 있는 들이다.   약구밭들 약구(여뀌)라는 풀이 많았다고 하는 들로, 부운 동북쪽에 있다. 약전평(藥田坪) 이라고도 한다. 지금도 부운지 부근에는 한창 꽃을 피운 여뀌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외배미 밤밭골의 동북쪽에 있는 논으로, 마을에서 떨어져 외롭게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안못 부운못 안쪽, 곧 안못의 앞쪽에 있는 못으로, 부운내지(浮雲內池) 라고도 했다.   서라벌공원묘원 대밭골의 부운산에 있는 공원묘원으로 70년대 중반에 약 30만 평 규모로 조성하였다. 운대2리 동쪽 산에 있다. 진입로 확장과 노인정 건립 숙원   이 마을 주민들은 노인정건립과 마을진입로 확장을 바라고 있었다. 노인정이 없어 마을회관을 빌려 쓰고 있는데 매우 불편하다고 한다. 마을에서 이미 부지는 마련해 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하루빨리 노인정이 지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그리고 마을 진입로가 좁아 확장해야 하는데 최근 땅값이 너무 올라 부지매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서라벌공원묘원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이기도한 이 도로는 성묘객이 몰리면 여간 혼잡하지 않고, 장의차 등 큰 차량이 들어올 경우 교행이 어려워 불편하다고 한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김병채(90·장로)할아버지, 진용희(88·김천댁)할머니 부부이다. 90대 노부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두 분이 모두 건강하시다. “예수님 의지하여 평안과 감사, 즐거움으로 생활한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는 두 분은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영향으로 아들 3형제가 모두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큰 아들 김성환(70·성남영광교회)목사는 18살에 망막염으로 실명했지만 역경을 딛고 목자의 길을 걷고 있고, 둘째 김춘환(65) 목사는 서울 신학대 학장이며, 막내 김인환(61) 목사는 서울합동총회 총신대 총장이다. 경주신문의 ‘마을을 찾아서’를 늘 보신다는 김 할아버지는 “우리 마을은 언제 오나 기다렸다”며 “우리 마을 신문에 잘 내 달라”며 웃으셨다. 할머니가 거실에서 넘어져 손목을 접질렸다며 붕대를 감고 계셨는데 빠른 쾌유와 두 분의 건강을 빈다.   또 이강복(45·육군중령), 전창우(33·서울 변호사)씨도 이 마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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