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왕 진지왕의 서자 ‘鼻荊郞’
크게 오래지 않은 어느 날, 남천 물살을 거꾸로 가로지르며 매끈하게 헤엄치는 물고기가 여러 사람의 탄성을 자아내곤 하였다. 지금은 추억거리로 식탁에 오르지만 그때는 분명한 하나의 고기로서 대접을 받았다. 황어라고 이름한 이 고기가 남천에 많이 올라왔다고 한다.
‘삼국유사’기이 제2 ‘桃花女와 비형랑’조에 비형이 뭇 귀신들을 데리고 놀았다는 황천이 곧 오늘날 남천이라고 한다니, 오히려 역사적 진실성은 지명에서 찾기보다는 고기 이름에서 찾는 것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라벌 사람들 사이에는 귀신을 쫓는 영험을 가진 노래가 ‘비형랑주사’라 하여 앞 다투어 이 노래를 적어 대문에 붙여서 귀신이 아예 범접을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갸륵한 임금이 낳은 아들
비형랑의 방이 여기라오.
날고 뛰는 뭇 귀신들아
이곳에는 머물지 못할지라.
학자들은 이 노래를 향가라고 추정하기도 하고, 주술요로 지칭하기도 한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한문으로만 기록하였고, 또한 노래라 하지 않고 글이라고 하여, 그 진위 파악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비형랑이 화랑이었다는 ‘화랑세기’13세 용춘공조 기록에서, 그리고 화랑들이 향가의 주요 담당층이었다는 주장에 귀를 기울여도 좋을 듯 하다.
신라 25대 사륜왕(금륜 : 진지왕)대에 도화랑이라는 사량부 백성의 딸이 자색을 뽐내고 있었다. 이에 왕이 상관을 하려고 하니, 도화랑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며 목숨으로서 절개를 지키고자 하였다. 하는 수 없이 왕은 장난스러운 말로 “남편이 없으면 될 수 있겠지” 하니 도화랑은 좋다고 하였다.
이 해에 왕은 임금 자리에서 쫓겨나 죽었다. 그 후 2년 만에 남편도 죽었다. 남편이 죽은 지 열흘이 지나자 왕의 혼령이 나타나 지난 일을 말하면서 다시 상관하려 하였다. 도화랑은 혼자 결정하지 못하고 부모님께 고하여 승낙을 받아, 이레 동안 왕이 머물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를 낳으니 비형이라 하였다. ‘삼국유사’에 비형의 탄생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륜왕에 대하여 좀 더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25대 진지왕으로 알려진 사륜왕(금륜)은 24대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 맏아들 동륜태자가 진흥왕의 후비 보명궁주와의 사통을 위해 보명궁 담장을 몰래 넘다가 큰 개에게 물려 죽어서 대신 왕위에 오르게 된다.
진지왕의 등극을 모색하고 사주한 사람이 곧 서라벌 최대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 미실이었다고 ‘화랑세기’는 전한다.
미실은 진흥왕이 죽자 먼저 태자인 금륜에게 자신만을 총애할 수 있는지를 확인받고서 진지왕을 등극하게 하는 치밀함을 보인다. 그러나 금륜은 왕위에 오르자 태도를 바꿔 다른 사람을 총애하게 되자, 미실은 약속을 어긴 것에 노하여 마침내 사도태후와 함께 낭도를 일으켜 진지왕을 폐하고 동륜태자의 아들 백정공(26대 진평왕)을 즉위시키게 된다. 이후 폐위된 진지왕은 3년간 유궁에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동륜태자가 일찍 죽었으므로 진지가 즉위하였다고 하고, 즉위후 4년 7월 17일에 왕이 돌아갔다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도 진지왕이 죽은지 2년후 혼령으로 도화랑과 관계하여 비형랑을 낳았다고 한다. 두 기록 모두 석연치 않은 점이 곳곳에 발견된다. 위에서 인용한 ‘화랑세기’를 보면 모든 의문이 풀어짐을 알 수 있다.
동륜태자의 죽음에는 부왕 진흥왕의 후비인 보명궁주와의 관계가 개입되어 있어서 유학자 김부식은 드러내어 놓고 올바로 적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진지왕의 폐위 사실도 전혀 기록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만 기록하여, 미실과의 섹스에 얽힌 사실을 그대로 옮기지는 못하였다고 판단된다. 일연스님도 진지왕과 도화랑과의 사통을 진지왕이 죽은 후 혼령으로서 이루어진 것으로 각색하여, 일연당시의 사회 규범에 맞추려고 하였다고 여겨진다.
이렇게 태어난 용춘(29대 태종무열왕의 親父)의 서제 비형랑은 밤이면 월성의 담장을 뛰어넘어 황천(지금의 남천 하류) 천변에 가서 뭇 귀신들을 데리고 놀았다. 진평왕이 날랜 군사 50명을 시켜 지켰으나 매번 놓치고 말았다. 군사들이 숲속에서 엿보니, 귀신들은 절에서 새벽 종소리가 들리면 저마다 흩어지고 비형랑도 돌아왔다. 군사들이 진평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니, 왕은 비형에게 신원사 북쪽 개천에 다리를 놓으라고 말한다. 이에 비형랑은 귀신 무리들을 부려 돌을 다듬어 하룻밤에 큰 다리를 완성하였다. 이 때문에 다리이름을 귀교라 하였다고 한다.
탑정동 수원지 울타리 안에 있는 신원사 터라고 알려진 곳에는 이젠 아무런 비형의 자취가 없다. 귀교가 어디쯤이었는지 추측도 불가능하리만치 변해버린 황천은 그냥 횡한 바람만이 기행자를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비운의 왕 진지왕의 사자로 태어나 13세 풍월주 용춘(이복 형)과 함께 힘써 낭도를 모았고, 삼국통일의 초석을 닦은 비형의 높은 기개는 ‘비형랑주사’를 통해 희미하게나마 접해 볼 수 있다는 데서 위안을 삼을 수 밖에… 박 진 환 프리랜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