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포지교(管鮑之交)
고사성어에 관포지교란 말은 관중과 포숙아의 사귐으로 서로 자신을 알아주는 아주 절친한 친구사이를 뜻한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薺)나라의 관중과 포숙아는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다.
그런데 관중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먹고 살기조차 어려웠지만, 포숙은 부잣집 출신의 귀공자였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포숙은 자금을 대고 관중은 경영을 담당하여 동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수입의 대부분을 관중이 독점하다시피 했다. 이익금을 나눠 가지면서 가난한 관중이 4분의 3을 가지고, 나머지는 포숙이 가졌다.
이를 지켜 본 주변 사람들이 이익분배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하자 포숙은 미소를 지으면서 진지한 목소리로 “관중은 결코 사리사욕을 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집안이 궁핍하므로 내가 잠시 양보하는 것뿐이다.” 라고 말하며, 포숙은 관중의 집안이 가난한 탓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하였다.
함께 전쟁에 나아가서는 관중이 세 번이나 도망을 하였는데도 포숙은 그를 비겁한 자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그를 효자로 옹호했다. 이와 같이 포숙은 관중을 끝까지 믿고 그를 밀어주었고, 관중도 포숙을 가리켜 “나를 낳아주신 분은 부모님이시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뿐이다”고 했다.
한 번은 관중이 포숙을 대신해서 어떤 일을 경영하다가 실패하여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지만, 포숙은 관중을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운세에 따라 좋은 때와 나쁜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관중은 일찍이 세번이나 벼슬길에 나갔다가 세번 다 군주에게 내쫓겼지만, 포숙은 관중을 모자라는 사람으로 여기지 아니했다. 다만 관중이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관중과 포숙은 둘 다 제나라의 정치가였으나, 관중은 포숙의 도움으로 환공(桓公) 밑에서 재상이 되어, 민심 교화와 부국강병을 실현하여 환공을 춘추시대 모든 제후들의 우두머리로 만들었다. 중국 법가 사상의 시조로 받들어지며, 그의 저서로 알려진 이 전해진다.
오늘날 같으면 서로가 정치가로서 라이벌 관계에 놓여 있지만 이해관계를 떠나, 친구를 위하여 두터운 우정을 간직하고 영원히 변치 않은 관계에서 우리 모두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귀감이 된다.
그래서 “관포지교(管鮑之交)”란 서로 신뢰하고, 위하며 정답게 지내는 깊은 우정의 실천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 주변에서는 이런 관계를 찾기가 어렵다.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대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고, 위대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금(金)은 불로 시험되고, 우정은 곤경에서 시험된다.”라는 영국 속담이 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