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오의 사모곡(思慕曲) ‘모죽지랑가’
벌써 여름이 한껏 기승을 부리며 시멘트 길을 달구어 낯면으로 훅훅 더운 바람이 길을 막는다.
늘 이용하던 시내버스지만 오늘은 왠지 모두가 졸고 있는 것 같다.
건천읍 신평2리 마을 앞에 다다르니 머얼리 여근곡이 눈앞에 뚜렷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날의 백제군은 여근곡에서 선덕여왕의 뛰어난 예지력으로 몰살을 당하였고, 고향으로 가지 못한 백제 고혼들은 이곳 오봉산 자락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귀향길을 아직도 찾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서라벌 왕성에서 보면 여근곡은 분명 서북쪽의 군사요충지였을 것이다. 뒤에 문무왕대에 산성을 쌓으니 바로 부산성(富山城)이다.
포도밭엔 탐스럽게 주렁주렁 옹종거리며, 포도가 특유의 연초록색 탱탱함을 유지하면서 무겁게 매달려 있다.
신라 화랑들의 맹약이 이 포도알처럼 견고하였으리라. 때는 신라 32대 효소왕시절, 풍류황권(화랑들의 출근부로 판단됨)에 열흘간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는 득오급간을 찾아 죽지랑(竹旨郞)은 이곳 부산성으로 한달음에 말을 달려 왔다.
그러나 익선대나마는 죽지랑의 예의를 갖춘 부탁에도 아랑곳 하지 않다가, 쌀 30석과 말안장을 뇌물로 받고는 겨우 득오를 풀어 주었다. 이 일이 화랑의 우두머리 국선화주(國仙花主)에게 알려지자, 대노한 화주는 도망간 익선대신 그의 큰 아들을 붙잡아, 동짓달 차가운 물속에 집어넣어 얼어 죽게 하고,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하는 사람은 모두 궁에서 내쫓고, 다시는 관직에 등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불문(佛門)에도 들이지 못하게 하고, 이미 중이 된 자는 큰 절에는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어찌보면 냉혹하다고 할 수 있는 연좌제가 신라시대부터 존재하였다는데서 20세기 분단의 아픔이 낳은 이데올로기 연좌제의 연원이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익선은 부정한 뇌물로써 숭고한 화랑정신을 더럽혔다고 연좌제의 사슬에 묶이었지만, 20세기 연좌제는 인간의 영혼까지도 연좌제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하니, 휠씬 더 가혹하다고 할 수 있겠다.
득오를 구한 죽지랑은 삼국통일기 역사기록에 빈번히 등장하는 김유신 버금가는 맹장이었다. 그의 가계를 보면, 신라 28대 진덕여왕대에 나라의 큰일을 의논하려 남산 우지암에 모였던 대신 중에 유신공, 염장공과 더불어 술종공(述宗公)이 있다. 이 술종공이 곧 죽지랑의 친부(親父)이다.
일찍이 술종공이 삭주도독사(中心地 : 現 春川)가 되어 죽지령(竹旨嶺 : 現 竹嶺)에 이르자, 한 처사(處士)가 길을 닦고 있었다.
술종공은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술종공이 임지에서 도착한지 달포가 지났을 무렵, 꿈을 꾸니 그 처사가 방에 들어 왔다. 그리고 술종공의 부인 또한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너무나 놀랍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 술종공 부부는 처사의 안부를 알아보게 하였더니, 바로 그 꿈을 꾼 날 처사가 죽었다고 한다.
이에 술종공은 ‘아마도 처사가 우리 집에 태어나는가 보다’하였다. 마침내 술종공의 부인은 처사의 꿈을 꾼 날부터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를 낳으니, 고개 이름을 따서 죽지랑이라 하였다고 한다.
탄생설화부터 비범함을 느끼게 해주는 죽지랑은 자라서 서라벌 존망(尊望)의 대상인 화랑을 이끄는 지위에 있으면서, 그에게 속한 화랑국선(花郞國仙) 무리를 끔찍이도 아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도 나타나듯이 서라벌 사내들은 한번 맺은 맹약은 죽음으로써도 깨지 않으려고 했을 만큼 중요하게 그들의 생활을 지배하였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득오가 풍류황권에 이름이 열흘간이나 보이지 않자, 죽지랑은 바로 득오의 어미에게 달려갔다. 득오가 익선아간의 명으로 부산성(富山城) 창고지기로 있다는 것을 안 죽지랑은 술과 음식을 싸가지고 득오에게 가서 그를 위로하고, 또한 익선으로부터 구하여 함께 서라벌 화랑무리로 돌아왔다고 하니, 득오의 죽지랑을 향한 사모의 정은 사부(師父)를 넘어 신(神)적인 존재와도 같은 대상이었을 것이다.
삼국통일을 완성하고 난 뒤 죽지랑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는데, 이 때 득오는 어떤 형태로든 죽지랑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식음을 전폐한 득오는 그를 위해 눈물로 제(祭)를 올리면서, 죽지랑을 위한 멈출 수 없는 사모의 정한을 향가에 얹어 불렀다고 볼 수 있다.
‘모죽지랑가’에는 죽지랑을 향한 애끓는 정이 너무나 생경하게 나타나 있어, 추모의 사모곡(思慕曲)으로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윗자리를 차지한다고 하겠다.
간 봄을 그리워함에
모든 것이 서러워 시름하는구나
아름다움 나타내신
얼굴이 주름살을 지으려고 하는구나
눈 깜빡할 사이에
만나뵈올 기회를 지으려이다.
낭이여, 그리운 마음의 가는 길에,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인들 있으
리이까.
부산성 채소밭엔 그날 익선의 밭에서 힘들게 일을 하는 득오의 모습이 여기저기서 아른거리며 나타나고, 뜨거운 태양은 도망간 익선을 찾아 강렬한 빛을 발하며 대노하고 있다.
화랑은 분명 아직 서라벌을 떠난 것이 아니다, 우리네 마음속에 굳건히 자리 잡아 있음을 다시 한번 절감하면서, 지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화랑들이 남긴 귀중한 유산을 가다듬고, 그들의 정신이 흠뻑 녹아 들어가 있는 천년 신라의 노래 향가를 열린 가슴으로 공손히 맞이하여야 하겠다.
돌아오는 길에 흥얼거리는 기행자의 콧노래가 향가이게 한다.
간♩ 봄을♬ 그리워♪~함에
박진환 프리랜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