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에 산이 둘러싸고 있어 ‘둘산’ 전통손명주의 맥을 이어가는 ‘명주마을’ 두산은 사방으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으므로 둘산, 둘산리, 두을산(斗乙山)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양지, 장아곡을 병합하여 두산(斗山)리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도 이곳 주민들은 둘산이라고 한다. 본래 둘산은 지금의 송전1·2리와 죽전까지를 포함한 분지 전체를 아우르는 지명이다. 둘산은 경주에서 4번 국도를 따라 감포로 가다가 검문소가 있는 어일삼거리에서 문무대왕수중릉과 감은사지로 가는 양남방향으로 약3km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두산대교를 타고 대종천을 건너면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쳐진 분지의 초입에 위치한 마을이 두산, 그 안쪽은 송전, 가장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 죽전이다. 둘산에 들어서면 마을 한가운데로 흐르는 두산천을 기준으로 그 북쪽 산기슭 양지바른 곳에 있는 첫 마을이 양지마을(30가구)이고, 들을 지나 남쪽 산기슭에 자리한 첫 마을이 장아골(30가구)이다. 이 작은 두 부락이 합해서 두산리를 이루고 있다. 총 60가구에 남자가 80명, 여자가 100명 등 180명이 살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운동으로 3부자가 공신녹권을 받은 김해인 김석견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임란창의 공신녹권 3권 가진 ‘둘산문중’ 두산은 전통베틀에 손으로 짜는 전통손명주로 잘 알려진 ‘명주마을’이다. 지금도 이 일대의 21가구가 전통손명주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두산리의 경우 양지마을에서 15가구가 명주를 짜고 있다. 이곳에서 짠 명주는 40자 1필에 55만원(염색시 70만원정도)정도로 가구당 연간 평균 10필정도씩 생산하고 있다. 마을 여기저기에 관계기관의 지원을 받아 똑같이 지은 누에를 치는 잠실들이 보인다. 경주시는 이 마을에 내년까지 3억여원을 들여 명주 생산ㆍ가공ㆍ완제품을 전시, 판매하는 명주 전시·홍보관을 세운다는 계획으로 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그러나 베를 짜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70~80대로 고령화되어가고 있고, 후계자가 없어 자칫 그 맥이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두산은 벼농사와 명주 외에도 토마토와 한우가 주산물이다. 토마토는 1천600평에서 연간 5천만원의 수익을 올리고, 한우 250두가 길러지고 있다. 이 마을 최고령자 박연기(87 지당댁) 할머니로 지당 박씨라서 지당댁으로 불린다고 한다. 아들 여덟을 낳아 4명은 어릴 때 잃고, 4남 2녀만을 키웠다는 박 할머니는 명주와 삼베를 70대까지 짜다가 지금은 며느리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250년전에 심은 것으로 알려진 느티나무를 당목으로 정해놓고 있다. 해마다 음력 1월 14일 저녁에 동제를 지낸다. 장아골은 마을 서산이 마치 활처럼 생겼고, 마을 안으로 흐르는 거랑이 활 시위처럼 생겨 ‘장궁동(張弓洞)’이라고 불려 왔으나, 그 뒤 세월이 지나면서, 마을 안으로 흐르는 내가 길고 청아(淸雅)하다고 하여 ‘장아골’ 혹은 ‘장아곡(長雅谷)’, ‘장동(張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주민들은 골짜기가 고디(고동) 창자처럼 생겨 장아골이라고 했다고 한다. 김해김씨 석견이라는 이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출전한 두 아들을 잃고, 이곳에 은거하며 마을을 일구었다고 전한다. 양지말은 볕이 잘 드는 양지(陽地)쪽에 마을이 있어 ‘양지말’이라 불렀다 한다. 백자천손(百子千孫)이지만 인물 안 나 종택(宗宅) 및 가묘(家廟) 임진왜란 때 의병운동으로 3부자가 공신녹권을 받은 김해인 김석견(金石堅)의 후손들인 둘산문중의 종가와 사당으로 약 400여년 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아골에 있는 종택에는 임란 창의공신인 문옹공 김석견과 그의 아들 몽수(夢秀), 몽남(夢男) 등 3부자의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 3권을 비롯해 당시 사용했던 옷과 신발, 초롱 등의 유품들이 보관되어있다. 백자천손이라고 했던가? 그 후손들은 23세손까지 자손은 많이 번창했지만 큰 인물이 안 난다고 했다. 이우정(二友亭) 김해김씨 도일(道一)·유일(惟一) 형제가 약 250년전에 장아골에 세운 정자다. 장아골 마을회관 뒤편에 있다. 야은정(野隱亭) 경주인 농수 이서필(李瑞珌)이 조선 숙종 때 양지마을에 세운 정자로, 지금의 건물은 고종 21년(1884)에 후손들이 다시 고쳐지은 것이다. 동계정(東溪亭) 경주인 동계(東溪) 이석복(李錫復)을 추모하여, 고종 29년(1892)에 후손들이 양지마을에 세운 정자이다. 두산서당(斗山書堂) 김해인 김석견이 400년 전에 지은 서당. 최근에 다시 고쳐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서당은 행정구역상 지금의 송전리에 있다. 두양정사(斗陽精舍) 김해부사를 지낸 경주인 열호재(悅乎齋) 최인백(崔仁伯)을 추모하여, 1974년 후손들이 두산리 618번지에 세웠다. 양지마을 북편 산기슭에 있다. 가매바우 장아골 뒷산에 모양이 가매(가마)처럼 생긴 영험한 바위. 혹은 바위가 똑바로 서 있다 하여 ‘선태바우’라고도 한다. 가매봉에 있다. 가매봉 가매바우가 있는 산으로, 장아골 동쪽에 있다. 혹은 이 산의 모양이 가매(가마)처럼 생겨서 ‘가매봉’이라고도 부른다. 다른 이야기는 옛날 큰물에(해일) 다 잠기고 이 산 꼭대기가 가마만큼만 남았다고 하여 ‘가매봉’이라고 했다고도 전한다. 구영밖들 양지마을 동쪽에 있는 들로 분지 바깥에 있어 마치 구멍을 나가서 있는 것 같다고 해서 ‘구영밖들’ 또는 구영밖이라고 불린다. 놀기미기 지형이 마치 노루의 목처럼 생긴 고개로, 양지마을 동북쪽에서 어일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옛날 도로가 나기 전에는 주로 이 길로 다녔다고 한다. 도간실고개 양지마을 동북쪽에서 어일리의 척현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뒤논들 마을의 뒤에 있는 들로, 찬샘 서쪽에 있다. 양지마을 앞들을 말한다. 장아골에서 볼 때 뒤논들이라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서원테 가매봉 밑에 있던 서원으로 빈대를 없애려다 불이 났다고 한다. 싸리밭 장아골 북쪽에 있는 들로 싸리나무가 많이 있었던 밭, 두산천 남쪽에 있는 들을 말한다. 자붓재 장아골 남쪽에서 양남면 상라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상라를 자부라고 불렀다. 형제봉 마을 서쪽에 있는 높은 두 봉우리로 높은 봉우리가 형이고 작은 게 아우봉이다. 그 상단에 큰 분화구가 있다. 마을진입로와 관정 늘려주길…>> 이 마을은 대체로 길이 잘 나 있고, 농수로도 깨끗하게 정비된 상태였다. 그러나 장아골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좁고, 양지마을의 경우도 마을 안길이 좀 좁은 편이다. 주민들은 농로확장 및 포장을 원하고, 관정을 늘여 농업용수를 늘려줄 것을 바라고 있다. 이 마을 출신은 김도환(69·전 영덕군수), 최윤섭(55·전 경상북도 기획실장), 김완섭(37·변호사/서울) 등이 있다. 글=김거름삶 사진=이종협 기자 자료정리=이채근 기자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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