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찾아서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을 마을 브랜드화
‘방어(防禦)’가 ‘방어(方於)’되었다 다시 ‘방어(防禦)’
방어리는 불국사 창건과 관련해 석공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의 슬픈 사랑의 전설이 서려있는 영지 아래(서쪽)에 펼쳐진 마을이다. 옛날 이곳에 방어사(防禦司)라는 군영(軍營)이 있었다고 하여 ‘방어사(防禦司)’, ‘방어지리(防禦旨里)’, ‘방어(防禦)’로 불리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때 ‘방어(方於)’로 한자표기가 바뀌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오던 마을 주민들이 마을이름을 본래대로 환원해 줄 것을 경주시에 요청, 2005년도에 다시 ‘방어(防禦)’로 되었다. 또는 ‘방어사(防禦寺)’라는 절이 있었다고도 한다. 경주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울산방향으로 가다가 불국사를 지나 괘릉에서 영지방향으로 우회전하여 약 2km정도 들어가면 영지를 만난다. 이 못 아래 넓은 들판을 끼고 있는 마을이 방어다. 방지, 못밑, 둔전, 원골, 만다리 등 5개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넓은 들을 끼고 있고, 영지로 인해 물이 풍부한 이 마을은 174ha에 친환경 우렁이 농법으로 농사를 지어 연간 12억5천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지난해 136ha가 저농약 농산물로 인정받았다. 또 올해부터는 시범단지 10ha에 종이멀칭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다. 논바닥에 종이를 깔아서 그 위에 모내기를 했다. 제초제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농사를 짓는다. 나머지는 모두 우렁이 농법이다. 지난해 9천킬로, 올해 7천킬로의 우렁이를 살포했다. 그리고 올해 원동마을이 친환경마을로 지정되었다. 농진청으로부터 연간 2억원의 지원금을 받아 영지에 얽힌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을 바탕으로 ‘아리아’라는 이 마을 고유 브랜드를 개발했다. 앞으로 이 마을에서 생산하는 쌀, 부추, 배, 강정 등 모든 농산물은 ‘아리아’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아리아’로 출하되고 있는 부추가 이 마을의 효자다. 110농가에서 연간 3억5천만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배도 13농가에서 연간 2억6천만원의 소득을 올린다. 한우는 대부분 농가에서 1~2마리씩 기른다. 마을전체 약 400여 마리다.
그 외에도 부녀회(회원 50명) 공동사업으로 설 때에 맞추어 무공해 쌀, 깨, 콩 등으로 만든 강정사업을 벌이고 있다. 수익금으로 경로사업과 부녀회기금으로 뜻있는 일에 쓴다.
이 마을은 총 230가구에 인구 545명으로 남자 273명, 여자 272명으로 30대에서 70대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외동에서도 젊은 사람이 제일 많다고 한다.
최고령자 이 마을에는 올해 96세 되는 할머니가 두 분이나 된다. 둔전마을 이계순(96 호동댁) 할머니는 필자가 찾았을 때 며느리를 도와 부추를 다듬고 있었다. “아들, 매느리(며느리)가 잘 해조가(해주어) 안 죽는다”며 빨리 죽어야 한다고 웃었다. 그러나 100수를 하고도 넉넉할 만큼 건강했다. 방지마을에 김기순(96 성곡댁) 할머니는 바깥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정도였다. 귀가 다소 멀어 의사소통이 어려웠지만 “누고”, “어디서 왔노” 등 소상하게 되물었다.
방지는 옛날 방어사(防禦司)라는 군영(軍營)이 있었던 곳으로 주민들은 ‘방어지리(防禦旨里)’와 구분하여 ‘방지(防於)’로 불러오고 있다. 경주이씨들의 집성촌이다. (54가구)
못밑은 영지의 제방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못밑’이라 하며, 길을 중심으로 위쪽에 있는 마을을 ‘웃말’, 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아릿말’이라 한다. 요즘에 와서는 ‘영호(影湖)’라 부르기도 한다. 청한이씨들이 주로 생활하고 있다. (42가구)
둔전(屯田)은 신라 경덕왕 때 군량미를 쌓아 두었던 군창(軍倉)이 있었던 곳으로, 군사들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농사를 짓고, 그 수확으로 군량미를 충당하였다고 하여 ‘둔전’, ‘둔논’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경주이씨들이 주로 많이 거주하고 있다. (56가구)
원골은 옛날 국도 7호선이 개통되기 전에는 부산·울산 등지에서 경주로 들어오는 큰길이 이 지역을 통과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이곳에 원(院)이 있었으므로, ‘원골’, ‘원곡(院谷)’, ‘원동(院洞)’이라 불러오고 있다. 접골원으로 유명한 원골이 이곳이다. 대부분 여강이씨들이 주거하고 있다. (42가구)
만다리는 영지초등학교가 있는 일대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만다리’라는 다리가 있는 곳에 최근에 마을이 들어서면서 마을이름도 ‘만다리’가 되었다.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산다. (35가구)
구암서당(龜岩書堂)·감화정(甘華亭) 회재 이언적의 8세손인 진사 이정익(李鼎益)이 후학들을 위한 강학을 위해 1818년경에 지은 서당이다. 또 구암서당의 동쪽 현액은 그의 호를 따서 감화정이라도 했다. 1850년경에 화재로 건물일부가 소실되어 중건하는 등 여러 차례 개보수하여 오다가 1990년에 새롭게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골마을의 이가산(李家山) 기슭,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 아래에 있다. 감화정을 지을 당시에 팠다는 연못에는 수련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이남서당(伊南書堂) 창건연대는 알 수 없고, 고종 18년(1880)에 중건했다는 기록만 있다. 그리고 1912년에 경주이씨 규한이 지방군현들의 힘을 모아 본당과 장서각, 고자실 등을 재 중건하여 이남서당이라 개칭하고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고 한다. 방지마을에 있다.
남계정(南溪亭) 군자감(軍資監)을 지낸 청한인 이태립(李台立)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임진왜란 때 창의 의사로서 청한이씨가 배출한 16의사 중에 한사람이다. 1950년대에 광산(光山) 아래 못밑마을에 세웠다.
방어리 열녀각(方於里烈女閣) 조선 영조 때 홍계발(洪啓發)의 처 경주김씨(慶州金氏)와, 후처 나주정씨(羅州丁氏)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 5년(1729)에 정려하고, 다음 해 비각을 세웠다. 김씨와 정씨는 남편이 병들자 병구완을 하며 길쌈을 하고 있는 어느 여름날, 호랑이가 나타나 남편을 해치려하자 김씨는 홑이불로 호랑이를 덮어씌우고, 정씨는 방망이로 호랑이를 때려잡아 남편을 구했다고 한다.
원동재(院洞齋) 회재선생의 종제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초산군수(楚山郡守) 등을 역임한 경력(經歷)공 이통(李通)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1935년에 원골에 세운 재실이다. 감화정 아래에 있다. 현재 후손들이 기거하고 있고, 현판이 재실 안에 걸려 있어 얼핏 보아 지나쳐버리기 쉽다.
만다리는 부산·울산 등지에서 경주로 들어오는 길목이었던 이곳에 영지에서 내려오는 큰 거랑을 건너기 위한 다리가 있었다. 길이3.3m, 넓이1.7m, 두께30cm의 자연석으로 된 돌다리였다고 한다. 이 다리로 하도 많은 사람이 지나다녀서 ‘만다리’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콘크리트다리를 새로 놓으면서 이 돌은 거랑바닥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이 길을 ‘구한길’이라고 부른다.
구암(龜岩)바우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로 구암(龜岩)이라고 한다. 감화정에서 연못을 지나 산길로 약100m 정도 올라가면 마치 거북이가 산에서 내려오다 멈추어 선 듯이 생긴 집체만한 바위가 있다. 이곳에 구암서당이 들어서 일명 서당바위라고도 한다.
창앞 군인들이 경작하던 둔논이 있던 곳에 곡식을 저장하던 창고가 있었다. 그 앞을 ‘창앞’이라고 한다.
불썬바우 원골 동북쪽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마치 촛불 같고 매우 영험하다고 한다. 이곳에 불을 밝혀 치성을 드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동네 아녀자들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정성을 드렸다고 한다.
뱀거랑 지금의 동천으로 본래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생긴 거랑이라고 ‘뱀거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하천정비로 곧게 편 뱀거랑이 되었다. 마석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이 거랑을 통해 흘러 남천이 되고 형산강이 된다. 이 거랑을 경계로 동쪽은 방어, 서쪽은 북토다.
새못 원골 서쪽에 있는 새로 만든 못으로, ‘원골새못’, ‘연꽃못’ 또는 ‘자곡지(磁谷池)’ 라고도 한다. 신라시대에도 있던 영지에 비해 새 못이라는 뜻으로 일제 이전부터 못이 있었다고 한다. 열녀각 옆에 있다.
애기난밧골 원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애기장군이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예수골 불국사 쪽에서 내려오는 봇물과 영지에서 내려오는 봇물이 합쳐지는 지점으로 양수골이 야수골로 요즘은 예수골이라고 부른다. 일부에서는 예수(여우)가 살았다고 하지만 잘못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화짓골 조선 순조 때 이정익(李鼎益)이 과거에 급제하여 화짓대(솟대)를 세웠다는 골짜기로, 미영밭골 동쪽에 있다.
학교못 영지초등학교 앞에 있는 연못으로 학교 앞에 있어 ‘학교못’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수련이 아주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동제 이 마을 동제는 정월 보름날 지낸다. 영호마을에 제당이 있고, 당목은 현재 거의 고사되고 일부가지만 살아남아 있다.
묵향 가득한 경로당 ‘삼우당(三友堂)’
방어리는 여늬 시골마을과는 많이 달랐다. 산간마을이 아니라 넓은 들판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지형적인 차이점 외에도 젊은 층이 상당히 두터운 마을이다. 따라서 활력 있고 소득도 높은 잘 사는 마을이다. 주민화합도 잘 된다. 부녀회를 중심으로 마을어른들을 공경하며 잘 섬기는 모범된 마을로 알려져 있다. 경로당에 논어의 익자삼우(益者三友) 손자삼우(損子三友)에서 따온 ‘삼우당(三友堂)’이라는 현판이 마음에 와 고인다. 경로당에 들어섰을 때 진한 묵향과 함께 지필묵으로 가득한 아주 색다른 광경을 목격했다. 마치 어느 서실에 온 듯 했다. 역시 그랬다 어른들이 있고, 어른들의 정신이 살아있기에 마을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고 윤기가 있었다. 그래서 1996년에 이 마을 경로당이 모범경로당으로 지정되어 보건복지부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영지아랫거랑 잦은 범람 주민생명위협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거랑이 너무 협소해 비만 오면 주민들이 대피하는 소동을 벌인다고 한다. 영지의 밀개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좁은 거랑 때문에 범람하는 일이 잦다고 한다. 지난해에도 62가구의 주민들이 대피하는 난리를 겪었다고 한다. 경지정리를 하면서 하천의 폭을 너무 협소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최근 이상기후로 인한 게릴라성 집중호우로 더 걱정이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영지 큰 못에 비해 그 하구의 거랑은 불과 3m 정도로 너무 좁았다. 이에 대한 개선이 요구된다.
그리고 주민들은 영지초등학교의 폐교를 걱정하고 있다. 전교생이 36명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이태일(65 경기대 총장), 최기환(59 전 청년유도회장), 이관섭(40 청와대)님 등이 이 마을출신이다.
비를 맞아가며 끝까지 안내해준 이관호 이장과 자료와 도움말을 주신 이종섭(76· 방어 943) 어른께 깊이 감사드린다.
글=김거름삶
사진=이종협 기자
자료정리=이채근 기자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