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천년의노래 향가의 발자취를 찾아
선화공주의 사랑노래 ‘서동요’
이른 새벽 아직 안개도 걷히지 않은 궁궐문을 나서는 선화공주의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초라한 노복 몇과 나귀 한 마리가 전부인 행렬을 머얼리 누각에서 바라보던 진평대제는 눈물의 주책없음이 이내 용포자락이 흥건함을 느낀다.
그것은 보내지 말아야 할 이별이면서,
보내야만 하는 한나라의 제왕으로서의 이별이었다.
왕후라고는 하지만 후사를 이을 성골 태자하나 생산하지 못했던 선화공주의 모후인 마야부인은 간장이 끊어질 것 같은 심정으로 선화의 옷깃을 붙잡았을 것이다. 물론 궁궐에선 흔하디 흔한 순금 한말을 노자로 주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달려 나가 선화의 행렬을 붙잡고 싶었다. 맏딸 만명(『삼국사기』에는 둘째딸로,『화랑세기』에는 맏딸로 기록되어있다)은 이미 용춘(용수라고도 함,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의 아버지)에게 시집갔고, 둘째 덕만은 여장부로서 아버지 진평대제를 이을 후사로 자신을 담금질하고 있었으나, 셋째 선화공주는 마냥 천진난만하게 진평대제 내외에게는 사랑 그 자체였을 것이다.
만약 이때 선화공주가 서동의 계책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덕만 언니(신라 27대 선덕여왕)를 뒤이어 왕위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선덕여왕이 삼서제에 의한 세 번의 결혼에서도 후사가 없어 결국 사촌동생인 진평왕의 동생 국반의 딸 승만이 왕위에 올라 신라 28대 진덕여왕이 되니 말이다. 그래서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신라의 삼한 통합의 원류는 화랑정신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화랑들이 그들의 생각의 폭을 무한대로 확장하게 한 뒷 배경에는 동양 역사상 신라에만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여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일본 역사에서 뗄 수 없다는 ‘비미히’ 여왕과 신공왕후가 있고, 중국에는 ‘무측천’이 여자로서 한나라를 짊어졌다고 하지만, 신라처럼 역사의 전면에서 여성이 군주로서 삼국통일의 기반을 조성한 것은 그 유래가 없다고 하겠다.
경상도 방언 아니 천수백 년 전의 한반도 표준어에 ‘뱀이 잘할까’ ‘비미 잘할까’라고 하는 말이 있다. 물론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언어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이 말의 뜻은 다른 사람보다 월등한 실력을 갖추고, 모든 행동거지를 올바르게 잘한다는 말이다. 일본 역사의 서막을 열었다고 일본인들이 숭앙해 마지않는 여왕이 ‘비미히’여왕이라고 하니 우리네 말로 보면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봉계로 가는 시내버스 차장으로 스치는 논배미는 이미 모내기철이 한창이고, 그날 선화공주가 귀양길에 걸었던 멀어만 보이는 부여길이 예였을 것이다. 봉계를 지나 국도 35호선 두동면 인박산 기슭이 슬픈 눈물의 선화공주의 심정으로 촉촉이 젖어 있다. 아마 이즈음에서 서동은 선화공주의 귀양행렬을 기다렸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갑자기 서동이가 나타나 공주를 호종하겠다고 하니 우연히 마음이 이끌려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 한다. 길 옆 자그만 풀꽃들의 꽃술로 쉼 없이 날아드는 벌 나비가 그날의 현장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지금도 나그네의 발길을 서동과 선화의 로멘스 현장이게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만히 접사렌즈 앵글이 아름다운 세기의 사랑에 엄숙하다고 할 밖에...
부여에 도착한 서동은 선화공주가 바구니 한 가득 무겁게 가지고 오는 물건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이오” 그러자 선화공주는 “이것은 보배롭고 귀중한 금이라는 것으로써 이것만 있으면 앞으로 편히 지낼 수 있을 것이오”한다. 이에 서동은 “예전 내가 마를 캐던 곳에는 이것과 같은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소”라며 웃으면서 답한다. 두 사람은 곧 이 금을 캐내어 지명법사의 신통력으로 신라궁전에 보내 진평대제의 마음을 안심시켜 주었다고 한다.
하루는 서동과 선화공주가 용화산 사자사로 불공을 드리러 갈 때, 도중에 한 연못에 미륵삼존불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공주가 청함에 따라, 다시 지명법사의 신통력으로 못을 메워 절을 지으니 ‘미륵사’라고 한다. 이 때 진평대제는 백공을 보내어 절의 완성을 도우니, 이 후 서로 안부로써 편지를 주고받아, 이로써 인심을 얻어 서동은 백제 제 29대 무왕으로 등극하게 된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지금도 미륵사가 있는 전라북도 익산에 가면 왕궁면 왕궁리 왕궁평성이 있고, 서동이의 탄생지인 마룡지, 서동이와 선화공주의 음택인 ‘말통대왕릉’과 조금 떨어진 곳에 공주의 능묘가 있어서 향가 가 한낱 허구에 찬 기록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다.
향가 의 배경설화에 금이 산더미처럼 많다고 하는 이 곳 익산은, 신라가 삼한을 통일하고 고구려, 백제 유민을 유화정책으로 포섭할 때, 고구려 왕족 안승을 ‘보덕국왕’으로 임명하여 금마저에 살게 하였다고 하는 곳이다. 익산의 옛 지명이 금마저이고 뒷산 이름이 오금산인 것으로 보아 서동이의 금에 관한 말이 사실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지금 경주와 익산은 서동과 선화공주의 숨결 찾기 행사를 십여 년 넘게 해오고 있다. 천여 년의 시공을 초월한 두 지방민의 아름다운 심성에 머리가 숙여진다. 익산의 왕궁평성을 나와 시내 중심가로 가는 길에 유난히 눈길을 끄는 포장마차 간판이 기행자를 붙잡아 머무르게 한다. ‘신라의 달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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