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남면 화곡2리
효자효부 많고 인재 많은 마을
화계 류의건 선생의 호를 따서 ‘화실’
화곡은 조선 영조 때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建)이란 선비가 서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한 곳으로, 그의 호를 따서 ‘화실(花室)’이라고 불러오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꽃이 많이 피는 곳이라 `화실`이라 불렀다고도 하고, 산세가 꽃 같다고 해서 `화실`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화주산(火朱山:소두방산) 밑에 마을이 있으므로 `화실(火室)`이라 부르던 것이 ‘화실(花室)’로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화곡은 경부고속도로 경주나들목 북쪽 약 300m 지점의 고속도로 밑으로 나 있는 굴다리에서 서쪽으로 약 5km 정도 들어가면 율동과 망성리를 지나서 있다. 북쪽으로는 벽도산, 동남쪽으로는 소두방산이 흘러내리면서 빚어낸 올망졸망한 자락에 위치한 산간마을이다. 울산, 내남 방면에서 이 마을을 가려면 이조에서 덕천을 거쳐 화곡으로 넘어가는 길을 택하는 게 훨씬 가깝고 빠르다. 요즘 고속철도 건설공사와 화천역사와 명계를 잇는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화곡은 벽도산을 경계로 고속철 신경주역사가 들어서는 건천읍 화천리와 맞닿아 있고, 소두방산을 중심으로 망성, 덕천, 상신, 비지, 부지 등과도 경계를 이루고 있다. ‘화실’, ‘벤다골’이 화곡1리, ‘송림’, ‘어련’이 화곡2리를 이루고 있다.
출향인들이 마을일에 적극적
화곡2리는 경주김씨와 김해김씨, 경주손씨가 다소 많은 편이고 각 성씨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벼농사 외에는 특별한 작물은 없고, 한우 130두 정도와 양봉농가가 있다. 이 마을의 김실근(63)씨는 벌 150통으로 내남면에서는 가장 많은 벌농사를 짓고 있다.
일찍이 효자효부가 많은 고을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지금도 이 마을 출신 청년 35명이 청년회(회장 김재윤 47 경주시 황성동, 총무 김재우 44 경주시청 기획공보실)를 결성하여 어른들을 잘 모시고 해마다 경로잔치를 열고 있고, 마을일에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 마을은 47가구에 남자 69명, 여자 57명으로 총 126명이 살고 있다. 최고령자는 올해 아흔살의 최달순(배반댁) 할머니로 송림에 산다.
물고기가 놀고 있는 형상 ‘어련’
*송림(松林)은 마을을 개척할 때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소리미’, ‘송림이’ 또는 ‘송림(松林)’이라 불렀다고 한다. (33가구)
*어련(魚淵)은 마을 모양이 마치 큰 물고기가 연못에서 놀고 있는 모습이라 ‘어리(魚里)’, ‘어린(魚麟)’, ‘어링이’, ‘어령’ 등으로 불리다가, 삼효자의 효행을 계승하려는 뜻에서 ‘어련(魚淵)’으로 불렀다고 한다. 또 마을 동쪽에 있는 산 모양이 마치 물고기의 비늘 같다고 하여 ‘어린(魚麟)’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고기가 살기 위해서는 물이 있어야 하므로 못 연(淵)자의 ‘어련(魚淵)’이라 고쳐 불렀다고도 한다. (14가구)
별이 떴다고 성부산(星浮山)
?소두방산(315m)은 마치 소두방(솥뚜껑)처럼 생겼다고 ‘소두방산’이라고 한다. 살자산(殺字山), 성부산(星浮山), 화주산(火朱山)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이 산과 관련한 몇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첫째)신라 때 벼슬을 얻고 싶은 욕심이 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시켜 밤에 이 산꼭대기에 횃불을 들고 서 있게 했다. 사람들은 이상한별이 나타났다고 두려워했고, 급기야 왕이 재앙을 물리칠 용한 사람을 찾기로 했다. 그 때 일관이 아뢰기를 “이것은 한 집안의 아들이 죽고, 그 아비가 슬피 울 일일뿐입니다.” 하였다. 과연 그날 밤 산 위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있던 아들이 범에 물려 죽고, 그 아비는 슬피 울었다 한다.
둘째)태종무열왕 때 백제의 잔당을 뿌리 뽑기 위해 군사를 한산주(漢山州)에 주둔시켰더니, 고구려와 말갈의 군사들이 포위하여 왔다. 이때 김유신이 “일이 급하니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고, 오직 신술(神術)로 구할 수 있다” 하고, 성부산에 제단을 쌓고 빌었다. 돌연 집채만한 불빛이 솟아올라 별처럼 떠서 적진을 향해 날아갔다. 그래서 이 산을 성부산(星浮山)이라 불렀다 한다.
*어련정(魚淵亭) 조선 때 경주김씨 응벽(應壁), 응규(應奎), 응정(應井) 효자 3형제를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세운 정자로, 어연마을 위쪽에 있다. 3형제는 부모상을 당하여 모두 관직을 버리고 산소 옆에 토막을 짓고 3년간 시묘를 했다. 이 때 개가 효자들의 효행에 감화되어 이 십리 길을 매일 편지 심부름을 했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3형제의 효행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중종으로부터 3형제가 모두 효자 정려를 받았다. 어련정은 본래 1585년에 건립했으나 여러 차례 허물어지고 중수를 거듭하여오다 1917년에 중건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건물은 1970년대에 새로 지은 것이다. 3효자 정려각은 오릉 동편 도로변에 있다.
*정려각(旌閭閣)은 이조 순조 때인 150여년전에 이 마을에 사는 경주손씨 성한(星漢)의 처인 월성정씨가 시아버지가 불치의 병으로 10여년간 병상에서 신음하자 대소변을 받아내며 간병했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의원이 “인육을 먹어야 낫겠다”는 말에 허벅지살을 칼로 도려 시아버지를 봉양했더니 신기하게도 회생하여 80세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지금의 정려각은 1991년 10월 6일 후손들이 세웠다.
*냉정재(冷井齋)는 경주최씨 문중의 재실로 최근에 냉정에 세웠다. 얼핏 보기에는 일반 가정집처럼 보인다. 대문간에 세워진 ‘冷井齋’라는 표석이 아니면 재실인지조차 알기 어렵다.
*어련서당터는 약 150여년 전에 후학지도를 위해 건립한 어련서당이 있던 자리로 어련정 위의 성부암 어귀의 계곡 옆이다. 지금은 서당은 없고, 그 자리에 어련김씨 문중의 묘가 들어서 있다.
*서당반석 어련서당터 앞 계곡에 있는 넓은 바위를 말한다. 이곳에 서당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 기린재는 송림 남쪽에서 덕천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기린 목처럼 길게 생긴 고개라고 ‘기린재’라고 한다.
? 문바우산은 화곡리, 상신리, 비지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마치 문(門)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문바우’, ‘문암곡(門岩谷)’이라고도 한다.
? 범바우는 안골 남쪽에 있는 바위로 범이 살았다고 하는 굴이 있으며, 호암(虎岩)이라고도 한다.
? 냉정(冷井)은 찬물이 나는 샘이 있는 곳으로 송림에서 덕천으로 넘어가는 고개 왼쪽에 있다. 지금도 차가운 샘물이 나오는 샘이 있다.
? 탕건바위는 문바위산에 있는 바위로 높이 솟아있는 이 바위 위에 돌을 던져 돌이 얹히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
? 평풍바우는 평풍(병풍)을 둘러 친 것처럼 바위가 죽 늘어서 있는데, 범바우 서쪽에 있다.
? 호암산(虎岩山) 범바우가 있는 산으로, ‘범바우’라고도 한다.
? 스무산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20여명이 운거하여 스무산이라 했다고 한다. 무남지 오른쪽에 있는 산으로 경주와 상신방향으로 전망이 좋아 운거하기에 적당한 산이다.
마을회관 증축, 수도관로 교체, 농로 확포장 숙원
마을회관이 비좁아 노인들을 위한 체육시설 하나 제대로 놓을 자리가 없다. 회관을 2층으로 증축하여 마을주민들의 건강을 위한 문화센타의 기능을 했으면 한다. 그리고 32년전에 설치한 상수도가 13mm에 불과한 수도관이 매설되어 있어 늘어나는 물 수요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수도관로 교체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 농로길 확포장이 시급한 주민숙원 사업이다.
넘쳐나는 인물들
물 좋고 공기 맑은 산골마을인 이 마을은 예로부터 효자 효부가 많은 효의 고을이며 또한 소두방산을 필봉으로 안고 있는 마을 형세 상 인재가 많이 난다고 한다. 그런데 소문대로 인물들이 참 많았다.
김영오(77 전 대구시청 기획실장), 김영종(75 전 외동읍장), 김진술(69 전 국무총리실 행정심판위원), 손재익(68 서희건설 사장), 김영식(67 경화여자중학교장), 김영환(65 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감사), 김영호(65 박사 새화랑유치원 설립자), 김영태(63 전 경주농협 전무), 김영문(61 경상북도 과장), 김영률(54 대우 중국현지법인 사장), 손진수(64 예비역 육군대령), 이봉관(63 서희건설 회장), 김태술(63 전 내남면장), 김정술(61 전 행정법원 부장판사), 손윤익(59 의료기상사), 김말환(53 육군대령 육군본부 법사), 조우만(51 행자부 사무관), 최경식(51 송림교회 목사), 조용철(47 삼성연구원 박사)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이장을 중심으로 어른들은 격려하고, 청년들은 따르고 도우는 단결된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서로 덕담하고 북돋우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에서 효는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몸소 실천함으로써 자연스레 본을 보이는 과정을 통해서 전염되듯이 그렇게 전파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마을취재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신 김00이장, 김영호 선생님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특히 맛난 점심을 마련해주신 부녀회원들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