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신라의 노래 향가의 발자취를 찾아서 上. 선화공주의 사랑노래 ‘서동요’ 빼어난 맵시의 기와 담장으로 줄 장미가 오월의 신부처럼 화사하게 붉은 볼에 연지를 도도하게 그려 넣고, 감미로운 당당한 어깨의 청년을 부르고 있다. 해님도 반가워 초례청 축가를 온 누리에 퍼지게 하고, 짙어서 터질 듯한 건강한 가로수 행렬이 빨간 주단으로 향가를 맞이하고 있다. 어디선가 꼴배는 초동(草童)들의 흥얼거림이 바람에 묻어서 반월성 주위를 애워 싸고 있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 놓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 흥겨운 가락에 한껏 고무된 떠거머리들은 이 골목 저 골목 서라벌 거리를 종횡무진 활보하면서 갑자기 천년 신라의 황도 서라벌이 일순간 저자거리이게 한다. 싱그러운 춘록 속에서 여름을 거닐던 진평대제도 이 노래를 뜻 모르게 따라 부르다가, 대간들의 간언(諫言)이 아니었다면 아리따운 셋째 공주 선화의 이야기라는 것을 모를 뻔 했다. 애지중지 선화공주가 뿌리도 모르는 마(薯)캐는 놈에게 몰래 시집가 놓고 밤마다 몰래 안고 가다니? 발(足)없는 말(言)이 천리(千里) 간다고 했던가. 급기야 는 온 서라벌 초동들의 유행가가 되어버렸다. 이 때 신라는 엄격한 골품제에 의한 족내혼(族內婚)이 일반화 되어 있어서 궁궐에서 자란 공주는 왕족끼리의 혼인만 용인되는 사회였다. 연일 계속되는 대간들의 참소에 진평대제는 대내외적으로 ‘공주의 귀양’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린다. 그러나 신라 최고의 미색과 방사기술을 갖춘 미실이를 품어 본 진평대제는 유교라는 중국식 관습으로 자신을 옥죄어 오는 신라 상류층 귀족 남성들의 겉치레를 고운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유학은 춘추전국시대 공 ? 맹에서 시작되어 한나라 동중서의 건의로 국학으로서 유교가 공인 되면서 이후 이천년 동양사상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육조시대(위진남북조시대)에 오면 유교는 다시 심한 뒤틀림을 맞이하게 된다. 특히 불교와 도교의 맹위에 불교를 국교로 선언하는 나라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뒤이은 수 ? 당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당황실은 도교를 신봉하였고, 당시 당나라와 밀착된 외교관계를 가졌던 신라도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송(宋)대가 되면 상황이 달라지게 된다. 이민족 금나라에 내몰려 남쪽으로까지 밀려난 송으로서는 국면전환이 필요하였고, 국면전환의 일환으로 유교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주희에 의해 불교 ? 도교적 색채가 가미된 유교는 ‘성리학’이라는 옷으로 바꿔 입고 화려하게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이 때 집성된 성리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유학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고 하겠다. 우리나라는 고려 末 순흥人(현 경북 영주) 안향이 성리학을 가져오게 된다. 당시는 부원파 권문세족들의 문란한 정치행태로 오백년 고려가 무너져 가고 있던 상황 이였다. 이 때 지방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가 성리학으로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꾸고자 하였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정몽주, 정도전, 이방원(왕으로서는 유일하게 과거시험에 합격함) 등의 신흥사대부와 무인 출신 이성계가 손을 맞잡고 조선을 개국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개국 후에도 성리학 사상이 완전히 뿌리 내리지 못했음을 여러 기록을 통해 실상 파악이 가능하다. 특히 조선 개국시조 태조 이성계의 딸(공주)과 결혼한 변계랑이 이혼을 하였다는 데서 극명히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관습적으로 지켜오고 있는 유교(성리학)적 규범들은 대부분 조선 9대 성종대 완성된『경국대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면 무방하다 하겠다. 아버지 진평대제로부터 궁궐을 떠나라는 왕명은 어린 선화공주에게는 죽음 그 자체였다. 구중궁궐에서 태어나 흙 한번 밟지 않고 고이 자란 선화공주였지만 그렇다고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미 온 서라벌에 퍼진 향가 는 선화에게는 귀를 막고서라도 듣기 싫은 노래였다. 선화공주는 대간들의 눈을 피해 고명한 스님을 찾아 반월성 안압지를 지나, 북천강물을 맨발로 건너 이차돈의 혼이 서려있는 백률사로 칠흑 같은 밤을 헤치고 달려갔을 것이다. 두려움도 무서움도 꽉 다문 입술로 물리치며,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데만 온 힘을 기울였다. 저 멀리 언덕위엔 새파란 도깨비불이 불야성을 이루며 공주의 앞길을 막았으나, 조그만 손으로 허공을 내치면서 종종걸음으로 어둠을 가르며 한 발 한 발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대덕고승이라도 왕명은 거스를 수는 없는 것. 선화는 울면서 발길을 돌려야만 하였다. 한편,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한달음에 서라벌로 달려온 서동은 자신이 지어서 퍼트린 가 온 골목을 누비는 것을 보고, 쾌재를 부르며 느긋하게 공주가 올 귀양길 어귀에서 밤이슬을 맞고 있었다. 서동은 왕자라고는 하나 할아버지 혜왕과 아버지 법왕이 왕위에 오른지 이태가 지나지 않아서 모두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서동이가 정상적으로 궁궐에서 자라지는 못하고,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면서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남지 못가에서 과부로 지내다 못의 용과 이물교혼(異物交婚)으로 서동이를 낳은 어머니는 한 많은 삶을 눈물로 보냈을 것이다. 지금 익산에 가면 ‘마룡지’란 연못이 있는데 이 곳이 서동이가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설화란 은유라는 껍데기를 벗기기 전에는 온전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데, ‘남지의 용’이라고 하는 서동의 아버지는 용이 곧 왕권을 상징한다는 의미를 접하면 곧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사실 를 보면, 백제는 후반기로 올수록 연씨, 국씨, 사택씨 등 8대 성이 왕권을 능가하는 지배세력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왕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육좌평은 이들 성씨가 독점하면서 권력을 나눠 가지고 왕권을 견제하면서 그들의 세력을 넓혀 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자신의 아들 41명을 좌평에 임명하는데서 보듯이 백제는 왕과 이들 8대 대성들간의 다툼이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태어난 서동은 왕자의 신분을 숨긴 채 몰래 자라고 있다가, 성년이 되자 대성들로 이루어진 귀족들을 누를 수 있는 거대한 후원세력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진흥왕이후 급격하게 한반도에서 세력을 넓힌 신라와의 연결은 좋은 배경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서동은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목표로 삼아 서라벌에 잠입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어린이들이 뜻 모르고 즐겨 부르는 동요가 끝없이 퍼져나간다는 사실에 서동은 무릎을 쳤을 것이다. 아마도 그 때 서라벌에는 와 비슷한 노래가 어린이들 사이에는 즐겨 부르는 동요였을 것이다. 급한 서동은 기존 에 선화공주와 자신의 이름만 살짝 바꾸어서 초동들에게 마(薯)로서 부르게 하였다고 판단된다. 서동이의 계책에 휘말려 생이별을 하게 된 진평대제는 하루도 편히 지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황룡사지 ? 분황사를 지나 보문으로 몇 발짝 가면 ‘숲머리 마을’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한길을 벗어나 오른쪽으로 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가다보면 이국정서가 물씬 풍기는 그림 같은 팬션을 여럿 만날 수 있다. 서라벌의 아름다움이 한 눈에 들어오고, 천년신라의 향내를 지척에서 맡을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아닌가 한다. 붉은 장미는 예서도 예외 없이 자꾸만 기행자의 발목을 붙잡음을 느끼면서, 선화공주의 혼은 아버지 진평대제가 영면하고 있는 ‘숲머리 마을’ 앞 넓은 들판 한가운데 우뚝 솟은 봉분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아름다운 석양은 낭산 산정의 선덕여왕릉 위를 호위하듯 둘러쳐 있고, 이곳 아버지 진평대제의 음택까지도 함께 감싸 안고서 애틋한 부녀간의 정을 저승이 아닌 이승에서 도란도란 하고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