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방문기(6) 동명왕릉을 찾아서(2) 21세기 교육행정연구원장, 교육행정학 박사 손 경 호 평양에서 개성으로 가는 길을 따라 버스를 타고 남으로 20여분 달리다 동쪽으로 다시 고속화도로로 바뀐다. 허허 벌판인 들녘을 따라 가면 함경남도 남단에 있는 항구도시 원산으로 가는 길이 뚫린다. 진입로에서 40분쯤 가다보면 다시 오른쪽 나지막한 구름이 눈앞에 다가온다. 고구려시조 주몽의 능인 동명왕릉은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으로 된 왕릉으로 그 규모가 북한에서는 가장 크며 들어가는 길목이 매우 멀어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는 졸본지방에서 일어나 한반도 북부와 만주를 무대로 하여 등장하였던 왕조였다고 한다. B.C 37년에 주몽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 동가강 유역에 건국하였다고 한다. 고구려는 일찍이 기마 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졸본지방에서 일어나 동방 침입의 요로인 통구로 옮긴 후 낙랑군과 임둔군의 교통로를 단절시키는 등, 한족(漢族)과의 투쟁과정에서 강대해졌다. 그 이후 두 차례나 외적 침입의 위기를 받다가 미천왕 때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한사군(漢四郡)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5분쯤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평지가 끝나는 곳에 정릉사(定陵寺)라는 사찰이 조용하게 서 있다. 사찰의 규모가 단조롭고 단청도 화려한 자취도 없이 왕릉 길목을 지키고 있다. 안내하는 내용처럼 지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고구려 시조 동명왕릉을 보다 넓게 정돈하다가 정릉사라는 사찰의 흔적을 발견하고 거기서 출토된 기왓장에 정릉사의 이름이 쓰여 있어 이 절을 복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들어서는 현관에 정릉사라고 써진 건물이 우리나라 사찰에 일주문에 해당하는 것이고 절 마당에는 7층탑이 서 있으며 그 뒤켠에 보광전이라고 쓴 대웅전이 뒷산의 소나무를 배경으로 하여 한국적 미를 살린 사찰이다. 금강산이나 묘향산에도 현대식 사찰이 서고 있지만 모양과 크기가 비슷하고 규모도 남쪽에 있는 사찰에 비해서 아주 작은 편이다. 사찰 내부의 부지도 넓지 않고 “ㄷ"(디귿)자 모양의 조그마한 절이 왕릉과의 전체 조화는 괜찮은 것 같아 보이지만 사람이 거처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40대 초반의 스님(?)이 불전에 시주하라고 권유하지만 도무지 스님 같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방문객이 예약되기나 행사가 있을 때만 근무하는 사람으로 생각이 되어 옛 맛을 잃어 꺼림직 했다. 동명왕릉 입구는 오르는 길에 경사가 완만하고 오른쪽에 비석이 있고 왕릉의 내력을 알리는 글귀가 쓰여 있지만 읽어보는 사람은 드물다. 신라왕릉 중 제일 작은 것에 불과한 능은 그들에게는 최고의 고전미를 갖춘 것이라고 크게 자랑하고 있다. 동명왕릉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산야는 높은 산이 별로 없는 평지에 산기슭에 집단농장만이 보이고 들판전체가 삭막한 분위기이다. 식량이 자급자족되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농사지을 비료가 없고 땅이 너무 척박하여 생산의 기대가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사과밭이 더러 눈에 띄지만은 열매가 거의 없고 추운 날씨 탓인지는 몰라도 성목이 되어도 결실이 없는 동토의 땅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