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방문기(5) 동명왕릉을 찾아서(1) 21세기 교육행정연구원장, 교육행정학 박사 손 경 호 한산하면서 적막감이 감도는 평양시내는 수많은 인파로 북적대고 있다. 10월 10일이 북한 노동당 창단 60주년이라는 미명하에 시가지 전체가 화사한 옷을 입은 여인네들과 40대 장년들로 요란하게 동원된 초∙중∙고생에 해당하는 10대들이 기념식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 속을 파고드는 방문객의 차량에 뜨거운 함성과 함께 축하의 인사가 이어지고 있다. 평양 시내를 벗어난 버스는 남쪽으로 10여분 가다가 동쪽으로 길이 갈린다. 원산으로 가는 길이다. 드문드문 어설프게 서 있는 이정표가 남쪽으로 계속 가면 개성으로 가는 길이고 소요시간이 한 시간 반쯤 걸리며 원산으로 가자면 두 시간 사십분 정도 가야한다고 한다. 10월 초순인데도 가을걷이가 거의 끝나가고 들판은 황량하고 나무가 거의 없는 삭막한 편이다. 평원 평야라고 가리키는 들녘은 땅이 척박해 보이고 농경지 정리도 거의 되어 있지 않다. 순안 국제공항에서 평양시내로 들어오는 거리는 외국 손님이 많은 곳이라 그런대로 모양새는 갖추었으나 내륙지방으로 들어서니 들판은 거의 비어 있고 간혹 과수나무 밭이 있긴 해도 그 시설이나 수확량이 별로 없는 것 같고 산 밑 농장 마을만 군데군데 보일 뿐이다. 그들이 말하는 평양-원산 간 고속도로는 왕복 4차선에 중앙 분리대도 없고 시멘트 포장도로에 노면이 울퉁불퉁하고 지나다니는 차도 정말 뜸하다. 말이 고속화 도로지 지방 국도에 불과한 낙후된 길이었다. 도로변 가로수는 버드나무와 은행나무가 띄엄띄엄 서있고 전신주도 키가 나지막한 나무로 되어있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평양에서 개성으로 가다 옆으로 차선을 바꾼 도로는 평양서 차도 40분쯤 거리에 있는 동명왕릉으로 가는 길이다. 동명왕은 고구려의 시조로 그 이름이 추모, 상해, 도모 등이 있지만 우리에겐 주몽, 동명성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금와왕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를 만났다. 금와왕은 유화를 데려다 궁중에 유폐 시켰는데 어느 날 유화는 햇빛을 받고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나니 그가 곧 주몽이었다. 그는 7세 때 이미 활을 잘 쏘는 등 영특하고 총명하였고 졸본부여로 남하하여 B.C 37년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칭하고 성을 고(高)라고 했다는 것이다. 북한 지도자들이 위로부터 동명왕을 존경하고 나라를 세운 고구려의 후손임을 크게 자랑하고 깊이 섬기는 것이다. 동명왕릉으로 들어가기 전에 왕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사찰을 중건하여 기념하는 곳이 바로 정릉사라는 사찰인데 최 근년에 지은 것으로 사찰치고는 너무 단조로운 단청이 과시용이요, 전시용이라는 것을 쉽게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