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에서 열렸던 ‘경주의 옛 사진전’의 많은 사진 중에서 내가 가장 주목한 것은 1920년대 헌덕왕릉앞에 하천냇돌이 앙상한 모습과 보문 부부총에서 바라본 동천(알천) 홍수범람의 모습이었다. 이 두 사진을 통해서 약 80여년 전까지만해도 북천(알천)의 홍수범람으로 헌덕왕릉 가까이까지 하천물이 흘렀다는 것이 증명된다. 알천의 홍수범람은 삼국사기등 역사기록에도 여러 차례 나온다. 또 홍수로 알천이 범람하여 김주원 대신 김경신이 원성왕에 오른 유명한 일화도 전해온다. 지금이야 덕동댐과 보문댐이 만들어졌고 북천 양쪽에 현대식 제방과 도로가 건설되어 있어 알천이 범람했었다는 것을 일반인들은 믿기가 어렵다. 그러나 사진은 거짓이 없다.    사진처럼 약 80여년 전에 헌덕왕릉 봉분 앞엔 앙상한 냇돌들이 발가벗고 누워들 있는 모습을 보면, 왜 헌덕왕릉 주위엔 흥덕왕릉처럼 석사자와 석인상등 석물이 없고 또 십이지신상 호석의 대부분이 유실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단번에 씻어진다.    그래도 사진만으로는 덜 풀리던 알천홍수범람에 대한 나의 호기심 마저 채우기위해 일제시대부터 사용된 5,000분의 1 지적.임야도를 보았더니, 헌덕왕릉(경주시 동천동80번지) 동편에서 알천의 지류가 양 갈래로 갈라져 흐른 긴 하천구거가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보문 부부총에서 바라본 알천의 전경에서와 같이 홍수가 날 때마다 알천 물길은 넓게 자유롭게 범람했고, 지금과 같은 반듯하고 튼튼한 제방은 없었다. 역사적으로 경주지역의 치산치수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아마 알천홍수관리였을 것이다.   정밀지도를 확인해보니 보무호수 바로 밑 보문교 삼거리의 해발고도가 73미터인데 비해 , 헌덕왕릉 부근 전답의 해발고도는 63미터이며, 헌덕왕릉 반대편 보문들의 해발고도는 약62미터였다. 그러니까 보문댐 밑에서 알천수계비까지 약 1킬로미터의 거리에 표고차 10미터의 급경사로 인해 빠른 유속으로 흐르던 알천물은 헌덕왕릉 부근에서 갑자기 넓어지면서 동천들과 보문들로 물길이 범람할 수 밖에 없는 지형적 원인으로 인하여 알천홍수는 해마다 반복이 되었나 보다. 여기서 서쪽 하류로 1킬로미터쯤 떨어진 분황사와 황룡사지는 해발고도가 평균 57미터이며, 여기서도 하류로 1킬로미터 떨어진 전랑지는 해발고도 46미터이기에, 현대식 제방이 생기기 전에는 홍수로 인한 알천범람의 재앙은 인력으론 피하기 어려운 서라벌의 숙명이었나 보다. 전 임천사지와 전 봉덕사지를 비롯하여 알천?! ゼ値? 인하여 유실된 문화재가 얼마나 많으랴? 처음엔 저지대습지였는데 흙을 메워 황룡사지를 지었다는 것도 삼국사기 기록뿐 아니라 고고학적 발굴때 토층의 분석에서도 확인된 사실이지만 지형적 고도를 비교하면 옛날엔 알천물길이 분황사지와 황룡사지 사이를 흘렀다는 것도 명백하다. 현재의 지적도에 보아도 분황사지 앞을 흐르는 알천 지류가 확인된다.   찬란했던 신라문화유적를 복원하는 작업엔 무너진 탑을 다시 세우고 불타버린 목조건축을  재건하는 것 외에도 어쩌면 많은 신라유적을 삼켜버린 신라시대 알천의 원래모습과 시대에 따라 그 흐름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도 연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알천은 신라역사의 중요한 요소였고 또 많은 신라유적유믈이 알천범람으로 인해 유실되거나 파묻혔기 때문이다.   신라왕경복원을 위해 가장 기본적인 중에 하나가 도로와 하천의 본래의 모습니다. 그러한 중요한 연구를 위해 이번에 전시된 작품중 알천의 옛  습이 담긴 사진 두장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