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선
가을이다. 하늘에 구름 흘러가는 모양이 그렇고 풀벌레 울음소리가 뜰에 가득한 것이 그렇다. 막 물이 오르는 가을 나무들처럼 해질 무렵의 저녁 하늘이 아름답다. 오늘 저녁은 달 관찰하기가 좋겠다. 초저녁에 서쪽 하늘에 보이던 달이 가을 들판의 곡식처럼 밤마다 익어간다. 동산처럼 아늑한 고분 너머로 보이는 달을 아이들도 보고 있을까? 가을 저녁 고분들의 고즈넉한 모습이 어린 왕자에 나오는 보아 구렁이를 삼킨 코끼리 같다.
3학년 과학책에 달 관찰하기가 나온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보이는 달 모양을 관찰해야 하는데, 달 관찰하기를 숙제로 내었더니 저희 집에서는 달 관찰하기가 어렵다고 시내에서 가게를 하는 성현이가 제일 먼저 속사포처럼 쏘아댄다. 그렇다고 물러설 내가 아니다. 엄마랑 서천에 운동 나가 관찰하라고 맞선다. 꽹과리처럼 요란하던 성현이 목소리가 금방 가라앉는다.
형산강 가에 산책로가 생겨 흘러가는 강물을 따라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밤늦게까지 줄을 잇는다는 것을 저도 알고 나도 안다. 순진한 지해는 달 관찰 숙제 첫날부터 흐린 하늘을 쳐다보며 눈썹달을 찾아내느라 고생했나보다. 출근하기가 무섭게 다가와 달이 구름 속에서 나오지 않더라고 울상을 짓는다. 내일은 어쩌면 은행잎처럼 노랗게 물든 달이 떴더라고 소식 전해줄지 모르겠다.
어젠 박물관이랑 안압지를 거쳐 반월성으로 가을 소풍을 다녀왔다. 먼 거리를 다리품 파느라 꽤 고생했건만 아이들은 하룻밤 자고 나니 생생한데 담임만 서리 맞은 가을 풀 형상이다. 돌아오는 길에 ‘아빠, 힘내세요’를 급조해 ‘선생님, 힘내세요’를 열창하던 녀석들의 모습이라니. 자춘이는 도깨비방망이로 뒤따라오며 어깨를 때리는 척 은근히 안마를 해 준다. 다리 아프다고 쉬어가자고 툴툴대던 녀석들이 저희 선생님이 힘들다는 한 마디에 금방 물이 오르는 게 참으로 신통하다.
소풍 가기 전에 계림과 반월성, 안압지에 대해 조사 학습을 한 때문인지 가는 곳마다 저네들이 문화유산해설사처럼 아는 체를 한다. 박물관 안압지관에 들러 출토된 유물을 관찰한 뒤에 안압지에 들렀더니, 느낌이 생생한가 보다. “선생님, 여기가 어디예요?” 묻는 아이도 있는 걸 보면, 다리는 아파도 들르기를 잘 한 것 같다.
가을은 농부가 추수하는 만큼이나 학교생활도 바쁘다. 운동회 언제 하느냐고 아이들은 목을 빼고 기다리고, 연습하는 내내 아이들은 펄펄 살아 날뛰건만 곰 같은 담임은 쉬는 시간 운동복으로 재빠르게 변신하고 운동장에 나가는 게 고역이다.
요즘은 쌀쌀한 아침 날씨 탓인지 등교하기가 무섭게 운동장으로 내닫던 아이들이 교실에서 신형 팽이 돌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훌라후프로 영역을 표시한 후 빙 둘러앉아 팽이 돌리기 시합을 하고 있다. 쉬는 시간과 공부 시간을 바꾸어 주고 싶을 만큼 아이들은 놀이에 열중한다. 저런 놀라운 집중력을 공부시간까지 이어지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해 본다.
어린 왕자처럼 순수한 저 아이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는 가을 저녁이다.
월성초등학교 교사. 경북 영천 출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