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수 백년 고목이 우거지고 단풍이 물들어가는 계림(鷄林)을 찾아 보았다.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깃든 계림(鷄林)은 신라왕궁이었던 월성(月城)에 가까이 위치하여 안압지와 함께 궁궐내 정원으로도 각별한 곳이었을 것이다. ‘계림(鷄林)’은 단순한 숲이라는 의미를 뛰어넘어 서라벌(현재의 경주지역)땅을 의미하거나 혹은 신라의 국호로도 불렸었다. 신라의 왕족과 신하들이 자주 거닐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계림(鷄林)! 그 곳에서 눈을 감고 상상의 나래로 역사산책을 떠나보면 문득 두 분의 역사적 인물이 떠오르고 그 분들이 고국 계림(鷄林)를 그리워하면서 타향에서 고향하늘을 향해 던졌던 그 언어들 속에 포함된 계림(鷄林)이라는 단어는 아직도 나의 마음 속에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첫째는 화려한 언술로 고구려 장수왕과 담판을 지어서 눌지왕의 동생 보해를 서라벌로 모셔오고,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눌지왕의 또 다른 동생 미해를 구출한 뒤 왜왕에게 고문당하면서 불에 타 죽기직전 만고충신 박재상(삼국유사엔 김제상)이 외친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다 (寧爲鷄林之犬㹠 不爲倭國之臣下)”는 말 속에 포함된 계림(鷄林)이라는 단어. 둘째는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쓴 혜초 스님의 인도 구법여행 중에 고국 신라를 그리워하며 지은 망향의 시 중에 포함된 ‘계림(鷄林)’을 의미하는 ‘림(林)’이라는 한 글자. 중국의 법현스님(A.D.399-A.D.410)이 11년, 현장스님(627-643)이 16년, 의정스님(677-689)이 18년간에 비하여 신라승 혜초스님은 723년부터 727년까지 4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동안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서역일원을 여행하였지만, 법현의 ‘불국기’, 현장의 ‘대당서역기’,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 등에 비해 결코 역사적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불후의 명저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왜냐하면 공교롭게도 혜초 스님이 인도와 서역을 순방하던 8세기 전반기는 서반구에서 신생 이슬람제국이 흥성하고 동반구에선 당 제국이 전성기를 맞아 이슬람문명권과 한(漢)문명권이 상치하던 시기여서 한국은 물론 중국문명권에서도 대식(아랍)에 대한 현지 견문록을 최초로 남겨 동.서 문명 교류사에 큰 발자욱을 남겼다. 혜초스님이 바닷길로 동남아시아를 거쳐 인도 동부해안에 도착하였고, 바이샬리, 쿠시나라가, 바라나시 등 동천국과 중천국을 거쳐 남천국 즉 현재의 나시크(Nasik) 부근을 여행할 즈음 만리타향 고국 신라(鷄林)국을 그리며 지은 오언시(五言詩) “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月夜瞻鄕路 浮雲颯颯歸 )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 들리는구나.(緘書忝去便 風急不聽廻)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我國天岸北 他國地角西) 일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日南無有雁 誰爲向林飛)” 의 마지막 구절. 그리운 고향 신라 땅 계림(鷄林)을 의미하는 ‘림(林)’이라는 한 글자(한자 다섯 글자씩 운을 떼는 오언시(五言詩)라서 ‘계림(林)’을 ‘림(林)’ 한 글자로 줄여 표현 한 것)에 담긴 그 깊은 맛이야 읽으면 읽을수록 그 진한 역사적 향기가 끝없이 베어난다. 틈나면 계림(鷄林)으로 문화재 산책을 권하고 싶다. 낭산의 신유림, 흥륜사의 천경림 등 신라역사엔 특히 숲(林)에 얽힌 전설이 많고 또 ‘숲(林)’이라는 글자는 단순히 나무들의 집합이란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은 신성스런 성역으로까지 추앙되기도 한다. 특히 다른 곳보다도 역사적 의미가 더 깊은 계림(鷄林)은 요즈음 같이 단풍이 물들무렵엔 가족들 혹은 친구들이랑 추억의 문화재 산책엔 안성맞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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