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사진9>유종준 경주천북지방산업단지 건설본부장, 수필가 “자네 어른도 이 집에 장가 왔는데 유서방도 이 집에 장가 왔네. 그럼 부자간에 처가가 한 터가 되는 셈이군.” 처가의 친척 분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와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어머니께 그 연유를 물어 봤었다. “지금 네 처가 자리가 외갓집이었어.”라고 하시더니 어머니는 말씀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이셨다. 광복 이후 같은 형제끼리도 사상대립으로 갈라졌던 아픔을 우리는 기억한다. 6·25가 터지고 어느 날 외가 마을에 국군이 와서 빨갱이 아지트 수색이 있었는데 마을 장정들이 협조를 하였고 도망을 친 그들의 복수로 인해 마을이 수난을 당했다고 한다. 그 후 빨갱이들이 순한 마을 사람들에게 활동사진을 보여준다며 한집에 모이게 하고는 포위한 뒤 방마다 사람들을 가두고 빗장을 친 뒤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그날 마을은 불바다가 되었고 운 좋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참변을 당했다고 했다. 지금도 음력 1월24일은 집집마다 제삿날이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미성년의 이모와 삼촌 네 분의 제삿날이기도 하다. 처참한 일을 당한 큰외삼촌은 고향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전답과 불타고 남은 집터를 팔아서 인근 면소재지로 이사를 했다. 외할아버지의 친구이며 아랫마을에 살았던 처조부님은 외가 터를 매입하여 새로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래서 외가의 집터가 처가가 된 것이다. 아버지께서 장가 드셨을 집터인 처가에는 지금도 그때의 돌담 일부와 감나무 두 그루가 남아 있다. 누구나 스스로 그 자리에 와 있는 줄 알겠지만 이렇듯 인연의 끈은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다. 나는 요즘도 처가에 가면 과거의 사연을 머금고 서있는 감나무를 보며 감회에 젖는다. 지난 한가위에도 처가에 갔다가 달이 하도 밝아 마당을 서성거리며 풍랑에 시달린 감나무가 말없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눈물이 핑 돌았다. 영영 떠나가신 어머니의 체온이 너무도 그리웠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집 앞을 지나치면 그리워 자기도 모르게 발이 머물고 행여나 눈에 뛸까 다시 걸어도 뒤돌아보면 그 자리에 또 서 있다는 명곡의 가사처럼 인연의 깊이가 두꺼운 처가에 오면 오래 머물고 싶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던가. 개성에 공단이 세워지고 금강산 여행을 하는 요즈음이고 보면 안타까운 과거사이다. 달빛은 그대로인데 돌아올 수 없는 인연들이 추석을 앞두고 그리움의 두께만을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