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에 대부(大夫)라는 벼슬을 가진 유백아(兪伯牙)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본디 초나라 사람으로 거문고의 달인이었다.   어느 날 백아가 조국 초나라에 사신으로 갈 기회가 있어 마침 고향을 찾았다. 마침 때는 추석 무렵이라 휘영청 밝은 달 아래서 구성지게 거문고를 뜯었다.   이때 허름한 차림의 나무꾼 한 사람이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엿듣고 있었는데 그는 음악을 꿰뚫고 있었으며 백아가 가슴에 산의 웅장함을 그리며 거문고를 타면 “아! 태산을 원망하는 것 같도다”라고 말하고 격류의 우렁찬 기상을 가슴에 그리며 거문고를 타면 ‘양양한 물결이 굽이치는 것 같다’고 평하였다.   이에 깜짝 놀란 백아가 “당신이야 말로 진정 소리를 아는 분이군요”라고 말하며 친구 하기를 청했다.   이 나무꾼은 종자기(種子期)라는 사람으로 이후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고 내년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이듬해 백아가 종자기를 찾았을 때 종자기는 이미 죽고 없었다. 백아는 슬픔에 못 이겨 종자기의 묘를 찾아가 마지막 한곡의 거문고를 타고는 거문고 줄을 끊고 산산조각 내 버리고는 죽을 때까지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지음(知音)이 없으니 더 이상 거문고를 탈 생각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었다 하여 이 고사를 우리는 백아절현(伯牙絶絃)이라고 하며 ‘마음까지 통할 수 있는 친구’를 지음이라고 한다.   백아도 없고 종자기도 없다.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없으면 거문고의 명인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어찌 보면 백아의 거문고 보다 그 소리를 감상할 줄 아는 종자기가 더 훌륭했는지 모른다. 정치라는 것도 그와 같다.   위대한 정치가란 백성들이 타는 심중의 거문고 소리를 정확히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소리 없는 그 마음의 음악을 듣고 같이 웃고 같이 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지도자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위정자들은 대부분이 애초에 음악에 소질이 없는 음치거나 백성들의 소리를 들을 줄 모르는 귀머거리일까? 언제나 국민의 여론과 상치된 시국관과 상반된 정책으로 일관할 때가 많다.   노무현 대통령이 연일 정치권의 연정이란 타이틀의 거문고를 타며 야당에 러브콜을 하고 있다. 야당은 어디 동네 개 짖는 소리 정도로 치부하며 아예 들은 척도 않는다. 노래 제목이 틀렸다는 것이다.    지금은 민생이나 경제라는 제목의 노래를 다들 듣고 싶어 하는데 얼토당토 않은 제목의 노래를 시도 때도 없이 연주하니 들어줄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거문고를 못 타서일까?   야권에 종자기와 같은 지음이 없어서 일까?   정부의 경제지수 발표와 전망과는 달리 서민경제는 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선가 불안과 분노가 뒤엉킨 슬픈 노래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당장 태평성세를 이루어 국민들을 편안하게 해주지 못한다 해도 국민의 마음속에서 나는 슬픈 사연의 노래를 들을 줄 아는 지음이 아쉽기만 하다. 종자기를 잃고 거문고를 부순 백아는 그래도 행복했는지 모른다.   우리에겐 애초에 백아도 없고 종자기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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