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남산 늠비봉 5층탑, 남산탑골 옥룡암 3층탑, 안강 정해사지 13층탑, 불국동 진현사지 탑재들, 포석정 서북편 절터와 황룡골 황룡사지. 이상은 지금까지 경주에서 조사된 󰡒귀마루 우동 석탑󰡓의 형태가 발견된 곳이다.   그런데 다른 곳은 한 두 번씩 가보았지만 이상하게 덕동댐 상류에 있는 황룡사지를 한 번도 못 가본 것이 늘 아쉬웠는데 마침 며칠 전 그 곳을 답사 간다는 일행이 있어 따라나서게 되었다.   신라 진흥왕 때 창건하고 선덕여왕 때 9층목탑을 세웠던 황룡사(皇龍寺)와 한글이름은 같으나 한자는 다른 황룡사(黃龍寺)터는 정말 깊은, 경치가 아름다운 계곡 속에 자리하고 있어 여름철 문화 답사지로는 그 유명한 무장사지에 결코 뒤지지 않는 곳이었다.   금당지 앞에 무너진 상태로 남아있는 동․서 쌍탑의 부재들을 보면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가람배치는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동서로 200여미터 폭이며 작은 골짜기 지형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금당터와 건물터 그리고 또 다른 탑터가 있었다. 맨 서쪽에 자리한 폭 15미터의 좁은 평지엔 탑인지 부도인지 규명하기가 힘든 석재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옥개석 석재에 귓마루 우동이 확연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이곳을 답사하다가 세로로 일정한 폭의 줄이 그어진 작은 기와편이 흙 속에 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일정한 폭의 줄 간격 사이에 명문이 새겨진 것이 보였다. 냇물에 흙을 씻고 자세히 보았더니 5글자는 완전하고 1글자는 󰡐권(券 혹은 卷)󰡑자의 상단 절반만 보였다. 󰡐공권(供券혹은 供卷)!󰡑, 󰡐기징(妓澄)혹은 묘징(妙澄)󰡑 그리고 󰡐비구(比丘)󰡑 세 단어로 추정되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조각이었다. 아마 조선시대에 이 절을 중건할 때 주지스님이나 화주의 법명과 관련된 내용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 절의 창건과 관련된 사적기나 금석문은 남아 있지 않고 다만 󰡐불국사고금역대기󰡑에 󰡒황룡사는 옛부터 전해지기를 신라 27대 선덕왕2년(633년)에 창건하여 약사상을 모시고 황둔사(黃芚寺)라 하였고, 소성왕 때 5년 연속 가뭄에 온 산천초목이 메말라죽었어도 이 계곡만은 풀과 나무가 이슬을 흠뻑 먹은 듯 푸르고 계곡 물이 더 불어나 이 일대 산을 은점산(隱霑山)이라 하고 이 절을 황룡사(黃龍寺)하 하였다.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된 것을 담화 스님이 중창하였고 그 후 폐사되다시피 하였으나 스님이 살고 있기에 1701년에 불국사에 속하고 심적암으로 바꾸고 중창(화주는 숭휼, 사흠)하였으며, 1708년(화주는 찬홍)과 1715년(화주는 국정)에 두 차례 더 중창하였다󰡓라고 전해질 뿐 고고학적 증거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주운 기와조각의 맨 왼쪽 줄 󰡐비구(比丘)󰡑란 글자 상단에 한문의 우측하단 일부분이 남아있는데 공교롭게도 불국사고금역대기에 전하는 1701년 중창당시 화주인 숭흘의 󰡐흘(屹)󰡑자나 1708년 중창 화주였던 찬홍의 󰡐홍(弘)󰡑자의 일부분과 비슷한 것 같아 기와조각을 만지는 나의 손이 떨렸다. 처음 가보았던 황룡사지. 정말 소문처럼 주변경치가 아름답고 또 남아있는 석탑 부재들도 신기하고 오랫동안 발길을 잡는 이상한 매력을 품고 있었다.   그 곳에서 명문기와를 처음 만나는 행운까지... 앞으론 더 자주 찾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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