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락의 아늑한 마을인 단성군 운리에 도착하였다. 단속사 터였다.   삼국유사 󰡐신충괘관󰡑에 두 가지 창건설화가 나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솔거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신라고찰 단속사터엔 전형적인 신라삼층석탑의 양식이 잘 보존된 동․서 삼층석탑과 당간지주만이 오랜 세월의 진한 향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조성년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비로자나불상이 있는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의 내원사를 들렀다. 그리고 지리산 청학동의 삼성궁과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의 유적인 산천재를 들렀다. 조선시대 중기를 대표하는 도학자로서 이황에 버금가는 학문을 이루었음에도 벼슬을 일절 사양하고 지리산에 은둔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던 조식 선생이 61세인 명종16년(1562)에 이 서재를 짓고 72세의 나이로 죽을 때 까지 이 곳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경륜을 펼친 곳이다. 오덕계, 정한강, 최수당, 곽재우 등 100여명의 인재가 그로부터 배출되었었다.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을 자주 보았기에 별로 특별하지 않은 한옥 건축물 중의 하나겠지하고 일행들과 함께 마당을 둘러보고 디카를 몇 컷 찍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몰린 곳은 󰡐산천재󰡑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마루였다. 정면 입구 마루 위에 올라가 보니 󰡐산천재󰡑라는 현판 왼쪽에는 소를 몰며 쟁기로 논밭을 가는 농부의 그림이 있고, 정면에는 신선이 소나무 아래 바둑을 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모두 신기하여 열심이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현판 오른쪽에는 버드나무 밑에서 귀를 씻는 선비와 그 물을 자기 소에게 먹일 수 없다고 소를 끌고 가는 농부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중국 고사에 전해지는 󰡐허유와 소부󰡑의 이야기란다.   요․순 임금시대에 요(堯)임금이 점점 나이가 들어 어떻게든 후계자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어 󰡐귀족이든 숨은 선비이든 그 출신 여하를 막론하고 임금자리를 물려줄 인물을 추천하라󰡑라고 명령을 내렸다.   일찍이 요임금은 당시 󰡐허유(許由)󰡑라는 사람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사람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이 소문을 들은 허유는 펄쩍 뛰면서 󰡐영수󰡑라는 강가의 귀산에 숨어 버렸다.   그 이후 요임금이 허유를 아홉주를 다스리는 지방장으로 임명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자 허유는 영수 강에 나가 자신의 귀를 씻고 있었다.   마침 소에게 물을 먹이러 왔던 허유의 친구 소부(巢父)가 왜 귀를 씻냐고 물으니 󰡐못 들을 말을 들어서 그 귀를 씻는 중이다󰡑라고 하며 요임금이 자신에게 벼슬자리를 주련다는 이야기를 하자 친구 소부가 소를 다시 몰아 강의 상류로 가려했다. 허유가 소부에게 왜 소에게 물을 먹이지 않고 가느냐고 물으니 소부가 대답하길 󰡐너의 더렵혀진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내 소에게 먹일 수는 없지 않은가?󰡑 하면서 소를 몰고 강 상류 쪽으로 가고 있었다는 유명한 중국고사 󰡐허유와 소부󰡑의 이야기가 바로 조식선생의 서재였던 산천재 툇마루 윗벽에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게 아닌가?   세 폭의 그림 모두 벼슬을 마다한 남명 조식선생의 삶을 단적으로 표현한 해학적이고 깊은 교훈이 담긴 그림들이었다.   남명 조식선생의 유적지인 산천재. 그 중에서도 툇마루 윗벽에 그려진 세 폭의 그림 중 수 천년의 역사보다도 더 깊고 진한 향기와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그 맛이 우러나는 그 어떤 한마디의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그 무엇이 담겨있는 󰡐허유와 소부󰡑의 고사 그림이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허유가 사양한 중국 임금의 자리는 순 임금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유명한 󰡐요.순 시대󰡑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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