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 세상 - 90
산을 내려오는 길
김 일 용
제3회 <신라문학 대상> 수상 시인.
두어 발 남은 햇살에
산봉우리가 불그레 익고 있다
저 아래 모퉁이 돌아가는 열차는
오늘 따라 쉰 목소리 길게 빼물었다
놀란 억새들이 산을 흔들었다
골짜기마다 가을을 내려놓고 가는 열차
억새는 늙은 간이역에 혼자 남아
허연 머리를 쓸어넘겼다
떠나온 길 되짚고 가는 길
서걱서걱 바람을 씹어삼켰다
겨를 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들
아무도 따뜻하게 길러준 이 없었다
시린 발등 옹이가 몇 개 박혔기에
퍼렇게 멍든 하늘 휘젓고 있는가
소슬한 색조, 지는 해 산그림자에
우리네 부질없는 몸짓이 일렁인다
티끌 떨쳐버린 그들 앞에서
허욕과 허세를 숨죽인다
산을 내려오는 길, 석이가 돋은 미륵불이
마음 한가닥 내어놓는다
석등이 켜지고
이윽고, 찾아 헤매던 마음 속 길 하나
환하게 뚫린다
시 평
아마 경주 남산을 내려오는 길일 것이다. 산을 내려오면서의 분위기와 심경을 잔잔하게 잘 풀어놓은 작품으로 묘사력이 뛰어남을 알 수 있다. 많은 말을 함으로써 이룩되는 것이 시가 아니라 그 정황을 어떻게 떠올려 반추해 내는가에 시의 매력이 있다면 그것에 충분히 값하는 시로 읽힌다.
󰡐소슬한 색조, 지는 해 산그림자에 / 우리네 부질없는 몸짓이 일렁인다󰡑 이런 대목에 오면 가히 절창을 이룬다. 그리고 󰡐석이가 돋은 미륵불󰡑을 발견함으로써 시인이 오늘 무엇을 찾고자 산을 올랐는지 몰라도 산을 내려오면서 이 󰡐미륵불󰡑로 인해 비로소 자아를 찾게 된 것이다.
우리 삶이 산을 오를 때처럼 야망 역시 숨가쁘게 출렁이겠지만, 그러나 내려올 때의 푸근한 마음 안에서 자신을 열어가는 것이리라.
수도 있는 우리네 삶의 아픈 생활사 다름아닌 것이다.
<서지월 / MBC문화센터 문예창작 지도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