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서원 137년 만에 복원
고려충신 서필, 조선 명신 서유 위패봉안
현곡면 하구리 구미산 자락에 조선초기부터 수백 년 동안 지켜오다 소실된 구산서원이 137년 만에 복원돼 오는 7일 오전 10시 고려충신 서필 선생과 조선 태종조의 명신 서유 선생의 위패 봉안식에 이어 오전 11시 준공식을 갖는다.
구산서원은 조선정조 10년에 경주 사림이 예조판서를 지낸 좌명공신 서유 선생을 봉안하고 구산사라 불러왔는데 헌종 14년에 도내 유림의 공의에 의해 서원으로 승격됐다.
당시 건물로는 상충사(象忠詞) 제락당(濟樂堂), 풍흥제(風興齊), 유의문(由義門), 어서각(御書閣), 신도비각 등이 있었는데 1868년 고종 5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소실되어 일부 누각만 남아 130여 년 동안 폐허로 있었다.
2003년 서유선생의 20대손 서병옥옹이 향사와 문로(門老)의 여망을 듣고 사재를 털어 문화계 인사의 조언을 받아 당시 건축양식대로 설계하여 구산서원을 복원하게 되었다.
이날 향사의 주관은 경주유림에서 실시하는데 봉안되는 두 분 중 서필선생은 고려건국초인 광종조에 태사(太師) 대광내의령을 지내고 고려왕조에 배향된 사람으로 거란의 소손녕을 물리친 서희의 아버지다. 고려사초에 상세히 기록된 바로 인권중시론을 제기하였고 귀화한 한인(漢人) 우대를 막고 나라기강을 확립하였다.
임금이 하사한 금 술잔을 되돌려 보낼 만큼 절제를 신조로 삼았고, 죽음에 임해서도 임금에게 󰡐더 이상 살생을 금하라󰡑는 충언의 글을 쓴 사람이다.
태종조의 공훈록에 의하면 서유선생은 왕자의 난을 바로잡아 추충익대좌명공신으로 이성군이라 봉하였고 태종이 서유선생의 영정을 그려 하사함에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세종대왕은 선생의 공을 태종비석 뒤편에 새겼고 선조는 불천위로 명하였다. 숙종 때에는 후손에게 특사를 하라는 단서철권을 내려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그가 사망하자 왕이 양경(良景)이라는 시호를 내려 양경공이라 한다.
이성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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