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생활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달성동고분군의 철제 등울 지난 4월 26일. 잠시 틈을 내어 대구박물관을 다녀왔다. 처음 간 대구박물관에는 많은 유물이 있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유물은 달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등울(篝臺;LATERN STAND) 이었다. 달성동 고분군은 대구 달성에서 출발하여 서쪽 와룡산 방면으로 연결되는 구릉에 조성된 고분군으로 일제시대인 1923년에 37호를 비롯한 7기가 발굴조사 되어 금동관. 금제 귀걸이 등 수많은 유물이 나왔었는데 삼국시대 서라벌 지배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부족들의 무덤군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대구박물관에는 달성동 37호 고분의 금동관을 비롯해서 장신구와 불상 그리고 수많은 토기 청동기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유독 등잔불을 얹어 놓았던 받침대인 등울이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다. 첫째는 나의 경험으론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희귀한 유물이었고, 둘째는 삼국시대 일반 사람들의 진솔한 생활상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유물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전깃불이 없었던 신라시대 사람들은 밤에 무엇으로 불을 밝혔을까? 이런 의문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것이 대구 달성동 고분 55호와 37-3호에서 출토된 철제 등울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소기름에 갈대줄기 등을 담가 놓았다가 불을 붙이기도 하고 중세시대엔 꿀벌의 밀랍을 이용한 양초를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고래기름으로 만든 왁스를 사용한 현대식 양초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8세기 이후부터이며 전구도 1879년에 발명되었으니 인류역사에 등잔불이 가장 오랫동안 사용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시골지역엔 호롱불과 등잔불이 여전히 애용되었었다. 2천년이 넘는 등잔불의 역사만큼이나 등잔불을 얹어놓는 등울의 재료와 생김새 또한 다양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1,500년 이전의 유물로 추정되는 달성동 고분의 등울을 현대식 전기 스탠드나 촛대받침 등의 디자인과 비교해 보아도 별다른 차이가 없음을 알 수가 있다. 옛날 사람들이 남긴 물적 증거(유물 유적)를 통하여 과거(그 시대의 생활상)를 연구하는 학문이 고고학이며, E.H.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했다. 달성고분군에서 출토된 등울이 삼국시대 우리 선조들의 거실이나 침실을 환하게 그리고 은은하게 비추어 주었을 그 모습을 상상해보면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책 한 구절이라도 정독해보면 정말 문화재 산책의 깊은 숨은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사진설명: 달성동 고분 55호 출토 등울(높이 83센티미터)와 37-2호 출토 등울(높이 49.8센티미터), 국립대구박물관 소장.